Main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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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ar:
2018
Publisher:
신혜경
Language:
korean
Pages:
288
ISBN 10:
1187119849
ISBN 13:
9791187119845
File:
EPUB, 8.57 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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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LENA
more books like this pls
19 August 2021 (06:00) 
shima
do you have 좋은 사람에게만 좋은 사람이면 돼 ? please
19 January 2022 (01:29) 
NINA
Need this in PDF please
15 February 2022 (0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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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SOMETHING I WANT TO TELL YOU / / essay / korean

年:
2021
语言:
korean
文件:
EPUB, 25.97 MB
2.5 / 1.0
2

De voorspelling

年:
2013
语言:
dutch
文件:
EPUB, 620 K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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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현

우리는 모두 슈퍼 히어로를 꿈꿨다. 그리고 지금은 세상이 아니라 나를 구하는 것이 먼저인 어른이 되었다. 애매한 나이, 애매한 경력, 애매한 실력, 애매한 어른으로 자란 우리는 모두 어른을 연기하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은 현재를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에게 전하는 위로와 응원을 담고 있다. 무엇이 정답인지 알 수 없는 세상살이. 누구도 흉내 내지 않고,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는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전한다. 더 단단하고 밀도 높은 위안과 응원이 담긴 김수현의 네 번째 그림 에세이가 당신과 함께한다.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우리’ 보통의 존재들을 위하여!





진지하지만 심각하지 않은 사람.

밝지만 가볍지 않은 사람.

미술학원에 다닌 적은 없지만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이화여대 경영학부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과기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했다.

지금은 일러스트레이터 겸 글쟁이이자, 괜찮은 그래픽 디자이너.

≪100% 스무 살≫ ≪안녕, 스무살≫ ≪180도≫를 펴냈다.





표지 그림ㆍ캘리그래피 김수현(instagram.com/217design)

디자인 마음의숲 고광표





Prologue





Part 1. 나의 삶을 존중하며 살아가기 위한 to do list

□ 내게 친절하지 않은 사람에게 친절하지 않을 것

□ 비참해지려 애쓰지 않을 것

□ 떳떳한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낄 것

□ 인생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상처받지 않을 것

□ 인생에서 숫자를 지울 것

□ 누군가의 말에 흔들리지 않을 것

□ 모욕하는 삶을 살지 않을 것

□ 스스로에게 변명하지 않을 것

□ 누구의 삶도 완벽하지 않음을 기억할 것

□ 보통의 존재로 충분히 행복할 것

□ 나를 평가할 자격을 주지 않을 것

□ 주눅 들 만큼 겸손하지 말 것

□ 나의 삶을 존중할 권리를 말할 것





Part 2. 나답게 살아가기 위한 to do llist

□ 단단한 자존감을 다질 것

□ 나다운 삶을 찾을 것

□ 더 이상 삶의 질문을 유예하지 않을 것

□ 당연했던 것에 질문할 것

□ 누구의 기대를 위해서도 살지 않을 것

□ 나 외엔 무엇도 되지 않을 것

□ 세상의 정답에 굴복하지 않을 것

□ 안목을 기를 것

□ 스스로 선택할 것

□ 개인의 취향을 갖출 것

□ 진짜 나 자신을 대면할 것

□ 자신이 빛날 수 있는 자리에서 살아갈 것





Part 3. 불안에 붙잡히지 않기 위한 to do list

□ 삶이라는 모호함을 견딜 것

□ 문제를 안고도 살아가는 법을 배울 것

□ 자신만의 문제라고 착각하지 말 것

□ 미래에 대한 엉터리 각본을 쓰지 않을 것

□ 진짜 해결책을 찾을 것

□ 과민해지지 않을 것

□ 충분히 슬퍼할 것

□ 힘이 들 땐 힘이 든다고 말할 것

□ 불안하다고 무작정 열심히 하지 말 것





Part 4. 함께 살아가기 위한 to do list

□ 서로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보일 것

□ 모든 이에게 이해받으려 애쓰지 않을 것

□ 서로의 경계를 지켜줄 것

□ 너그러운 개인주의자가 될 것

□ 일상에서 승패를 나누지 않을 것

□ 미움받지 않기 위해 좋은 사람이 되지는 말 것

□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일에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

□ 모든 사람과 잘 지내려 욕심내지 말 것

□ 생활 기스와 완전 파손을 분류할 것

□ 지금의 관계에 최선을 다할 것

□ 그린라이트가 켜졌다면 직진할 것

□ 그럼에도 누군가와 함께할 것





Part 5. 더 나은 세상을 위한 to do list

□ 때론 재미없는 이야기를 할 것

□ 스스로를 비난하지 말 것

□ 나의 몫을 외면하지 않을 것

□ 필요하다면 버틸 것

□ 조바심은 버릴 것

□ 잘 싸우는 법을 배울 것

□ 희망의 근거를 만들 것

□ 기꺼이 세상에 호의를 베풀 것

□ 돈으로 환원되지 않는 나 자신이 될 것

□ 헝거게임에 참여하지 않을 것

□ 방황하는 어른이 될 것





Part 6. 좋은 삶, 그리고 의미 있는 삶을 위한 to do list

□ 행복을 삶의 목적이라 부르지 않을 것

□ 가볍게 살아갈 것

□ 삶의 경우의 수를 늘릴 것

□ 메마르지 않으려 노력; 할 것

□ 다들 알아서 행복할 것

□ 얻은 것은 무엇인지 생각할 것

□ 지나간 과거와 작별할 것

□ 인생에 여백과 바보비용을 둘 것

□ 그래도 당신은 당신을 이해할 것

□ 나의 행복에 관심을 가질 것

□ 완벽하지 않음을 사랑할 것

□ 어떻게 살 것인지 물을 것

□ 어른으로 살아갈 것





Epilogue

Thanks to





Pㆍrㆍoㆍlㆍoㆍgㆍuㆍe





생각해보면, 나는 늘 ‘이유’가 궁금했다.

그래서 학창 시절, 선생님이 내게 무언가를 시키면

언제나 “왜요?”라고 물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내가 반항을 한다고 여겼는데,

나는 정말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본 거였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는 건 내겐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런 나는 어른이 되었고,

어느 날 문득 내 자신이 초라하고 무력하게 느껴졌다.

애매한 나이에 애매한 경력과 애매한 실력.

나는 제대로 갖춘 것도 보장된 것도 없는 애매한 사람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애매한 어른으로 자라버렸을까.





그때 나는 내가 뭘 잘못했을까 생각했다.

전공 선택을 잘못했던 걸까?





대학교 때 조금 더 열심히 하지 않은 게 잘못이었을까?

일하며 더 버티지 못한 게 잘못이었을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잘못이 없었다.





물론 내 인생에는 약간의 실수와 약간의 방황과 약간의 오류가 있었지만,

그건 삶에 있을 수 있는 시행착오가 아닌가.





나는 학창 시절 선생님 말에 이유가 궁금했듯이,

아무 잘못 없는 개인이 왜 초라함을 느껴야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때의 나는 많은 책을 읽었는데,

취미의 책 읽기가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읽었다.

나는 왜 초라해졌는가에 대하여.

나는 왜 당당하지 못했는가에 대하여.

나는 왜 아무것도 아닌가에 대하여.





그리고 궁금증을 해소해가며 내가 내린 최종적인 결론은,

세상이 나의 존재를 무가치하게 여길지라도

나는 나를 존중하고,

나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도 된다는 거였다.

이 책은 내가 느꼈던 초라함의 이유이자,

나를 초라하게 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나의 답변이다.





그동안 책을 쓰며,

나는 독자에게 잠깐의 위안과 잠깐의 따뜻함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조금 더 오랜 시간 머무를 수 있는

단단한 위안이자 응원이고 싶었다.





냉담한 세상에서,

아무런 잘못 없이 스스로를 질책해야 했던

나와 닮은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다.

우린 잘못이 없다고.





나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도 된다고 말이다.





GOAL





보통의 존재가

내가 아닌 것을 시기하지 않으며,

차가운 시선을 견디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살아가기 위하여.





의학, 법률, 경제, 기술 따위는 삶의 도구가 되지만

시와 아름다움, 낭만과 사랑은 삶의 목적인 거야.

_<죽은 시인의 사회> 중에서





내게 친절하지 않은 사람에게

친절하지 않을 것





대학을 갓 졸업했을 무렵, 나는 한 회사에서 인턴을 했다.

내가 처음으로 배정된 팀에서 만난 주임은

나를 하인처럼 대했다고 할까? 갑질이 적당할 듯.

자기 앞에 있는 모니터를 10cm 옮기는 것도 나를 시켰고,

사소한 실수만 해도 “나 엿 먹여?”라며 면박을 줬다.

사회생활이 처음이었고,

모든 게 평가 대상이었던 인턴 신분의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저 이 집단의 가장 아래 놓여있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호모인턴스 시절을 보냈다.





그렇게 인턴십을 마치고 한참이 지난 어느 날,

잠자리에 드는데 갑자기 그 선배 생각에 분한 마음이 일었다.





내가 정말 참을 수 없었던 건, 그녀가 나에게 한 행동이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도 표정 한 번 구기지 않은 나 자신이었다.





큰 권한이 있던 것도 아닌데

대단한 권력이라도 지닌 듯 구는 그녀에게

나는 단 한번도 꿈틀하지 못했고,

그런 나의 태도는 그녀가 나를 점점 더 하대하게 만들었다.





좀 다른 경우긴 하지만,

민주화 운동을 하다 고문을 당했던 사람들이

과거를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이유는 그때 겪었던 고통이 아니라

고문관에게 잘 보이려 했던 자신의 비굴함이라 했다.





사람의 자존감에 치명상을 끼치는 건,

부당한 대우 자체보다 부당한 대우에 굴복한 자기 자신인 거다.





그러니 우리에게 친절하지 않은 이에게,

우리를 존중하지 않는 이에게, 친절하려 애쓰지 말자.

상황을 바꿀 수 없을지라도 적어도 그들에게 비굴해지지는 말자.





저열한 인간들로부터 스스로의 존엄함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에겐 최소한의 저항이 필요하다.





비참해지려 애쓰지 않을 것





인스타그램이라는 신세계에 입성했을 무렵,

랜덤으로 사진이 보이는 피드에서

약간의 과장을 보태 허리까지가 가슴인 엄청난 글래머의 사진을 보았다.

그녀의 인스타그램에 들어가 보니 말로만 듣던 럭셔리 SNS였다.

예쁘고, 몸매 좋고, 명품을 휘감고, 늘 해외여행 중인 여자.

하지만 나에게 문화충격을 준 것은 나와 다른 그녀의 삶이 아니라

그녀의 수많은 팔로워였다.





도대체, 그 많은 사람들은 왜 이 여자의 삶을 들여다볼까?

궁금해하며 계속 들여다보니,

문득 아침에 맛있게 먹은 삼각김밥이 처량해졌고,

득템 했다고 좋아한 8,900원짜리 OMG 스팽글 가방이 초라해졌다.





미디어는 너무 쉽게 타인의 삶을 훔쳐볼 수 있게 하고,

옛날 같았으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이들의 완벽해 보이는 삶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런데 과연 그 호기심은 무료일까?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법》이란 책에서는

타인의 삶을 훔쳐보며 내 삶과 비교하는 것이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법이라 이야기했다.





우리 역시 약간의 호기심을 충족하기 위해 타인의 삶을 구경하고,

그 대가로 비참함을 지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충족된 호기심으론 어떤 것도 얻을 수 없다.

그 에너지와 호기심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삶을 돌보는 데 사용해야 한다.





그러니, 타인의 삶에 기꺼이 친구는 되어주되 관객은 되지 말자.





몇 장의 사진으로 요약된 그들의 삶보다

우리에겐, 우리의 삶이 더 소중하다.





부디 비참해지려 애쓰지 말자.





떳떳한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낄 것





내가 어릴 적엔 <성공시대>라는 TV 프로그램이 있었다.

성공한 사람들의 일대기를 보여주는 방송이었는데

매주 인물이 바뀌지만 이야기의 서술은 언제나 동일했다.

과거의 비참한 현실과 현재의 성공을 대비시키고

엄청난 노력과 불굴의 의지가 그 간격을 메운다.

그걸 보고 있노라면, 아무리 힘든 환경이라도

노력으로 극복하고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른이 되어 생각해보니 그건 능력주의의 시작이었다.

개인의 능력과 ‘노오력’만 있으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자기계발서 같은 이야기.





그러나 능력과 노력은 성공의 마스터키가 아닌

여러 요인 중 하나에 불과하다.

게다가 과거에 그러한 성공 신화가 가능했던 건,

그때는 한국이 고성장 시기였고,

다들 지지리 못살아서 개인 간 자본의 차이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개인이 계층을 이동할 기회를 찾기 어렵고

공정한 능력주의의 전제 조건인 기회의 평등은 지켜지지 않은 채

부모의 자산, 배경, 계층의 이어달리기가 진행 중이다.

물론 여전히 노력과 능력으로 큰 성공을 이룬 이도 있으나

그렇다 해서 노력과 능력만 있으면

누구라도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진실이 아니다.

그들에겐 ‘운’이라는 비능력적인 요소가 동반되었고,

소수의 예외가 전체를 대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노력 = 능력 = 성공]이라는 등식은

[게으름 = 무능 = 가난]이라는 등식으로 자동 연산되어서

가난의 이유를 노력이 부족한 개인의 탓으로 돌리고

차별과 계급을 정당화한다.

무한한 기회가 열려있는데도 가난한 것은 너의 탓이니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그래서 사람들은 가난하면 쪽팔리다.





그러니 가난해 보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히말라야를 등반하는 것도 아닌데

학교엔 노스페이스나 K2쯤은 입고 가야 가오가 살고

부녀회에선 비싼 아파트처럼 보이기 위해

아파트 이름을 영어로 바꿔야 한다는 촌극을 벌인다.





기회가 평등하지 않은 능력주의는 허구일 수밖에 없음에도

성공시대와 자기계발서가 심어놓은 왜곡된 능력주의는

우리를 부자인가 아닌가 하는 결과값에 맞춰

우쭐함과 부끄러움 사이 어딘가에 놓이게 했다.





하지만 막상 주변을 둘러보면

그저 운이 좋아서 혹은 상속받은 자본으로 부를 이룬 부자가 한둘인가.

가난하지만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이웃이 한둘인가.





과정은 스킵한 채

편법을 저지르고 약자를 착취해도

돈이 많은 부자는 당당하고,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았어도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이 부끄럽다면

그건 이상한 일이 아닐까.





가난하다 해도 삶에 최선을 다했고 떳떳하게 살아왔다면

그 삶에 자긍심과 자부심을 느껴야 한다.





세상에는 부끄러워해야 할 부가 있듯이

떳떳한 가난이 있다.





인생에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상처받지 않을 것





나이를 먹으며 절감하는 건

언제 밥 한번 먹고 싶은 사람들조차도

시간을 내서 보긴 어렵다는 사실이다.

그렇기에 좋아하지 않거나 잘 맞지 않는 사람들은

고등학교 때 옆 분단에 앉았던 은경이와

재무팀의 박 대리가 그랬듯이

인생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이들의

공적인 업무를 위장한 사적인 짜증과

걱정을 위장한 모욕과

질문을 위장한 무례함에

마음을 졸이고, 상처받고, 미움을 쌓는다.





하지만 월급의 2배짜리 명품백만이 낭비가 아니고,

연예인 걱정만이 낭비가 아니다.

우리 삶에서 곧 사라질 존재들에게

마음의 에너지를 쏟는 것 역시 감정의 낭비다.





그만두면 끝일 회사 상사에게

어쩌다 마주치는 애정 없는 친척에게

웃으면서 열받게 하는 빙그레 쌍년에게

아닌 척 머리 굴리는 여우 같은 동기에게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들에게

더는 감정을 낭비하지 말자.





마음 졸여도, 끙끙거려도, 미워해도

그들은 어차피 인생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일 뿐이다.





인생에서 숫자를 지울 것





인터넷에 떠돌았던 나라별 중산층의 기준이다.





영국(옥스포드대에서 제시한 중산층의 조건)

- 페어플레이를 할 것

-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 나만의 독선을 지니지 말 것

-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할 것

- 불의, 불평, 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것





프랑스(퐁피두 대통령이 ‘삶의 질’에서 정한 중산층의 기준)

- 외국어를 하나 정도 구사하여 폭넓은 세계 경험을 갖출 것

- 한 가지 이상의 스포츠를 즐기거나 하나 이상의 악기를 다룰 것

- 남들과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별미 하나 정도는 만들어 손님을 대접할 것

- 사회 봉사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할 것

- 남의 아이를 내 아이처럼 꾸짖을 수 있을 것





대한민국(연봉정보사이트 직장인 대상 설문)

- 부채 없는 아파트 평수 30평

- 월 급여 500만 원 이상

- 자동차는 2,000CC급 중형차

- 예금액 잔고 1억 원 이상

- 해외여행은 1년에 몇 번





영국, 프랑스와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 기준에 빠짐 없이 등장하는 것.

그건 바로 숫자다.





한번은 인터넷 서핑을 하다

‘나의 결혼 가능 점수’를 알려준다는 배너 광고를 본 적이 있다.

사주 사이트인가 했는데 그건 결혼정보회사 사이트였다.

나이, 키, 몸무게, 자산 액수, 연봉 등 수많은 숫자를 입력하고 나면

소고기처럼 등급을 매겨 나의 결혼 가능 점수도 알려준다는 거였다.





이게 진정한 의미의 한국형 알파고가 아닐까 싶었다.

우리는 무엇이든 숫자로 책정하는 것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나 자신의 값어치를 매기는 일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그렇게 세워진 숫자의 삶 속에서

개인은 이력서에 쓸 숫자들을 위해 분투하고,

집의 평수로 관계에 금을 긋고,

파업이나 집회가 있으면 어떤 가치의 충돌인지가 아니라

얼마의 돈을 손해보고 있는지를 헤드라인으로 읽는다.

그야말로 가치는 잊은 채 서로의 값어치만 묻는, 숫자의 삶이다.





그런데 숫자라는 건

언제나 비교하기 쉽고 서열을 매기기 용이하다는 특징이 있다.

예를 들어, 세모와 동그라미를 비교하여 서열을 매길 수는 없지만,

1과 2를 비교하여 서열을 매기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결국, 숫자의 삶이란

쉴 새 없이 비교되며 서열이 매겨지는 삶인 것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낮은 값어치가 매겨질까 안절부절못하고

자신의 위치와 서열을 끊임없이 확인한다.

그렇다면 삶의 모든 것을 숫자로 측정할 수 있을까?





아이큐가 지혜를 측정할 수 없고,

친구의 숫자가 관계의 깊이를 증명할 수 없으며,

집의 평수가 가족의 화목함을 보장할 수 없고,

연봉이 그 사람의 인격을 대변할 수는 없다.





진정한 가치는 숫자로 측정되지 않는다.

그러니 만약 당신이 우월한 존재가 아닌

비교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싶다면

가장 먼저 삶에서 숫자를 지워야 할 것이다.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은

숫자가 담을 수 없는 것들에 있다.





누군가의 말에

흔들리지 않을 것





SNS를 통해 친해진 정미 씨는 내 전작을 읽은 독자로

사랑스럽고, 따뜻한 사람이다.

그런 그녀에겐 사랑꾼 남자친구가 있는데,

그녀는 종종 남자친구와의 일화를 SNS에 기록했고,

나는 그들이 죽은 연애 세포를 살려내는 사랑스러운 커플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전혀 모르는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작작 좀 하라는 댓글을 남겼다.

다른 사람들 불행한 건 생각 안 하냐고.





물론, SNS에는 지나치게 과시적인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보증하건대 그녀는 결코 그런 타입이 아니었고

자신이 느꼈던 소소한 행복을 기록했을 뿐이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는지 고민했다.

하지만 잘못은 어디까지나 그 댓글을 남긴 사람이

자신의 내면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데 있었다.





우리는 종종 나의 의도를 오독하고,

나에 대해 비난하는 이들을 만난다.

인터넷 뉴스에 배배 꼬인 악플을 남기던 사람들이

SNS로, 일상으로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떠들기 좋아하는 그들에 대한 대처법을 조언하건대,

누군가 당신에 대해 비난이 포함된 판단을 내린다면

당신이 알아야 할 점은





첫째, 그건 한 개인의 지극히 주관적 견해일 뿐

그 사람이 솔로몬이나 프로이트는 아니라는 것.

둘째, 그것이 당신을 향한 비난이라면

해야 할 일은 화를 내거나 슬퍼하는 게 아니라

비난의 진실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

그 비난이 진실이라면 안 좋은 점을 고치는 계기로 삼으면 되는 것이고,

그것이 그저 상대 내면의 문제에서 비롯된 거짓이라면

그냥 개가 짖는다고 생각하면 된다는 것.

셋째, 만약 개가 계속 짖으면?

가만히 듣고 있지 말고, 마땅히 그 책임을 물으시라.





죄명은? 명예훼손 죄? 아니. 소음공해 죄.





모욕하는 삶을

살지 않을 것





인터넷에 맞춤법이 틀린 글이 올라왔다.

그러자 그 아래에 ‘극혐’이라는 댓글이 잔뜩 달렸다.

극혐이라는 건 극도로 혐오스럽다는 뜻인데

나는 맞춤법을 틀리는 게 왜 극도로 혐오스러운 일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맞춤법을 틀리는 것으로 세종대왕을 모욕하겠다는 저의를 읽을 수도 없고,

모른다고 해도 그게 혐오의 범위에 들어갈 정도로 잘못한 걸까?





극혐, 개저씨, 기레기, 설명충, 급식충, 유족충, 맘충, 보슬아치, 한남충, 등

수많은 모욕과 혐오를 담은 단어들이 일상으로 들어왔다.





그 의미는 우리가 서로를 너무 쉽게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혐오주의의 원인을 주로 중산층 붕괴로 이야기한다.

지위에 불안을 느끼는 이들이 누군가를 내몰아

자신의 사회, 경제적 지위를 되찾고자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전부일까.

그렇게만 해석하기엔 그 대상이 무차별적이고 광범위하다.

나만 하더라도, 대한민국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김치녀로 묶이고,

결혼해서 전업주부를 하면 취집충, 아기를 낳으면 맘충,

설명하려 들면 설명충, 진지하면 진지충이 된다.

벌레가 아닌 사람으로 살기 참 어렵다.





이러한 일상적 혐오에 대해 《모멸감》의 저자 김찬호 교수는

웬만큼 잘나지 않으면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그 공허를 채울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타인에 대한 모멸이라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희미해진 자신의 존재감을 느끼고 열패감을 보상받기 위해,

얄팍한 우월감을 맛보기 위해 타인을 모멸한다는 것이다.





열패감에 젖은 이들은 ‘혐오’로 맺어진 단단한 유대 속에서

서로의 찌질함을 감추고, 실제로 경험한 것이 아니라 해도

원하는 정보만을 소비하며 대상에 대한 뒤틀린 이미지를 강화한다.

그리고 그 혐오에 모멸감을 느낀 이들은

다시 혐오를 미러링(mirroring) 하고, 복제해간다.

그 결과 인터넷에선 누가 더 혐오스러운가에 대한

끝없는 경쟁이 펼쳐진다.

그런데 이 혐오 경쟁 끝에 ‘나와 다른 모든 이들은 혐오스럽다’

라는 결론을 내린다면 그땐 속이 후련할까?

혐오스러운 인간들이 도처에 널려있다는 불신과

삐끗하면 나 역시 비웃음과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긴장 속에서

우리는 조금 더 조심스럽고 조금 더 날카로워질 뿐.





단언컨대,

서로에게 가해자가 되는 세상에선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

남을 모욕하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인 이들을

‘루저’라 부른다.





스스로에게

변명하지 않을 것





젊은 시절 운동권에 있었다는 어느 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는 명문대를 졸업했지만 운동권 출신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제대로 된 직장을 잡지 못했다.

그런 그는 자본주의를 혐오했는데,

이렇게 불합리한 구조에선 일할 수 없다고 말하며

언제부턴가는 일자리를 구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마흔을 넘긴 나이까지도 일을 하지 않았고,

그 결과 모든 생활비는 청소 일을 하는 어머니의 몫이 되었다.





누가 보더라도, 이 사람의 논리는 허점투성이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사회적 구조를 비난하면서도

자신은 어머니를 착취하고 있으니 말이다.

주변 사람들은 일할 시도조차 하지 않는 그를 이해할 수 없어 했고,

그의 어머니를 불쌍하게 여겼다.

대체 무엇이 그를 이토록 이해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을까.





짐작하건대, 당시 명문대를 나왔던 그는

스스로에 대한 기대도 이상도 높았을 거다.

하지만 운동권이었다는 이유로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현실에서

얼마나 많은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껴야 했을까.

거기다 경제적 독립에 실패했다는 사실은 그에게 수치심이 되었을 것이고

그가 품었던 자아 이상에 치명적인 손상이 가해졌을 테다.





자신에 대한 수치심, 무가치함은

사람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감정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이 감정을 숨기고자

냉소를 무장하고, 문제의 원인을 외부의 탓으로 돌리며

변명 뒤에서 자신을 보호한다.





그런데 문제는 변명으론 자신을 지킬수 없다는 데 있다.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한 변명에는 그 자신도 속지 않기 때문이다.

겉으로 아닌 척해도 무력감과 수치심은

여전히 내면에 처리되지 못한 채 남아있게 된다.





소설가 김형경은 《사람풍경》에서

사랑의 반대말이 증오나 분노가 아니라 무관심이듯,

생의 반대말은 죽음이나 퇴행이 아니라 방어의식이라 이야기했다.

방어의식은 사람을 영원히 자기 삶 바깥에서 서성이게 한다.





그 역시 오랫동안 삶의 바깥에서 서성이며 맴돌았다.

자신을 초라하게 하는 현실과 마주하며 무력감과 수치심을 감당할 바에는

차라리 동네의 고상한 레지스탕스가 되는 편이 나을 거라 여겼을 수 있고,

부조리한 세상에 상처받는 것이 두려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더 이상 그 과거에 묶여 인생 전체를 소진해서는 안 된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자책과 원망을 소거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투명하게 재평가해야 한다.





대학 시절,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애썼던

자신의 노력에 자부심을 느껴야 하고,

좌절된 욕구는 어쩔 수 없었음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심하고 부끄러워할 건

좋은 직장에 다니지 못하는 거나 성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이 기대했던 모습은 아닐지라도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걸 견뎌야 할지라도

변명을 덜어낸 진짜 자기 자신과 마주하자.





그리고 그 마주 봄 끝에

가장 중요한 건 다시 시작하는 데 있다.





누구의 삶도

완벽하지 않음을 기억할 것





중학교 3학년 때, 같은 반 남자애가 나에게

“네가 힘들 일이 뭐가 있겠냐”라고 말한 적이 있다.

추측하자면, 나는 반에서 잘 떠들고 괄괄한 타입이었는데

조용했던 그 아이는 내가 부러웠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 중증의 중3병을 앓고 있던 나는

부모님과의 갈등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대신 난 다른 친구를 부러워했는데, 그 친구야말로 힘들 일이 없어 보였다.

예뻤고, 다들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어했다.

그런데 몇 년 후 친해진 그녀는 내게 중 3때가 가장 힘들었다며,

선생님들의 차별과 편견에 죽고 싶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신기한 일이다. 그 남자애도 틀렸고 나도 틀렸다.

우리는 자신에게 결핍된 부분을 가진 누군가를 볼 때,

그 사람의 인생은 완벽하다고 느낀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타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박연선 작가의 드라마 <청춘시대>의 마지막 회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한 달간 중국으로 떠나는 진명을 보며,

공항 직원들은 “부럽다”, “너도 부모 잘 만나서 태어나”라며

서로 속닥거린다.

하지만 사실 진명은 6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지냈던 동생이 죽은 후,

전 재산 170만 원을 털어 무작정 떠나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며 타인의 삶의 무게를 짐작하지만,

타인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 전부가 아니듯,

우리의 눈에 비친 타인의 모습도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각기 다른 상처와 결핍을 가졌으며, 손상되지 않은 삶은 없다.





그렇기에 당신이 알아야 할 분명한 진실은

사실 누구의 삶도 그리 완벽하지는 않다는 것.

때론 그 사실이 위로가 될 것이다.





+

친구가 갑자기 카톡으로

‘넌 항상 열심히 사는 것 같아. 늘 자극 받는다’라고 보내왔다.

난 그냥 엎드려서 쇼핑몰 배송 조회를 하고 있었는데.





보통의 존재로

충분히 행복할 것





어린 시절, 차를 타면 언제나 해가 나를 따라온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젠가 세일러문 정도의 마법소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다.

물론 성인이 되어서도 이런 생각을 계속 한다면

중증의 과대망상 판정을 받기 딱 좋을 것이다.

그래도 나이를 먹으면,

악의 무리로부터 세상을 구하는 영웅은 아닐지라도

어딘가 특별한 어른이 되어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평범한 어른으로 자라났다.

화려한 삶도 아니며, 무한의 자유를 누리지도 않는다.

여전히 소고기는 마음껏 사 먹기 어렵고,

좁은 생활 반경 속에서 멋없는 일상은 반복된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평범한 어른 중에 한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지점,

어린 시절 내가 품었던 이상을 떠나보내는 지점

어른의 사춘기는 그 지점에서 오는 게 아닐까.





물론 그 순간이 슬프고 씁쓸하기는 하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환상과 기대감에서 벗어나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존재로서 자신의 삶을 꾸리는 것,

어른의 숙제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앞으로도 세일러문이 돼서 지구를 구할 일도,

소로본 대학의 교수가 될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나의 동창들이 내 소식을 듣고

배가 아파 복통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고,

친척들이 가문의 영광이라며 나를 우러러 보는 일도 아니다.





대신 내겐 쓰고 싶은 글이 있고,

조금 더 잘 해보고 싶은 그림과 디자인 일이 있다.

가족과 시간을 더 보내고 싶고,

수영을 배워서 바다에서 마음껏 시간을 보내고 싶고,

다양한 관점을 가진 사람들을 만나며 나의 세계를 확장하고 싶다.





내 삶에는 많은 제약이 있고, 보장된 것은 없지만

특별하지 않은 보통의 삶에도 허락된 많은 것들이 있다.





어른의 사춘기는 자신의 평범함을 인정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삶을 채울 수 있을 때 종결되는 것이며





우리는 그 순간

진짜 어른이 될 것이다.





나를 평가할 자격을

주지 않을 것





예전에 친구가 소개팅을 했던 남자는

친구에게 좋아하는 운동이 있냐고 물으며

골프나 승마 같은 건 안 좋아하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건 사실 취미가 아닌

상대의 경제력을 가늠하기 위한 질문.





남자든 여자든, 이성의 경제력을 보는 게 나쁜 건 아니다.

나 역시도 분명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를 무시할 수 없는 것과

쉴 새 없이 계산기 두드리는 소리를 내며,

사람의 모든 걸 숫자로 환원시키는 건 좀 다른 문제다.





사는 집을 확인하고 연락이 없었다는 사람,

부모님 직업을 확인하는 것에 모든 대화를 쏟는 사람,

그런 상대들 앞에서 누군가는





답안지를 제출한 아이처럼

상대가 나에 대해 내릴 평가에 불안하다고 했다.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리 불안해 할 필요가 있을까?





내 경우를 말하자면 아무리 능력 있다 해도

숫자를 지나치게 좋아하는 사람은

삶의 기쁨이 너무 단출한 것 같아서 전혀 섹시하지 않다.

한마디로 내 취향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에겐 내가 자격미달이겠지만

그 사람도 내겐 자격미달인 거다.





내게 필요한 건 나와 닮은 단 한 사람일 뿐이지

그들이 아니며, 그들만 나를 평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만약 누군가 나를 숫자로 평가한다면?





놀구 있네. 니들은 어차피 다 탈락이야, 이것들아.





주눅 들 만큼

겸손하지 말 것





책을 내고 난 후, 종종 친구들은 나를 ‘김 작가’라 불렀다.

하지만 친구들끼리 장난처럼 하는 말이었을 뿐,

나는 나를 작가라 여기지는 못했다.

작가의 사전적 의미는 글이나 그림 등의 창작자일 뿐임에도,

작가의 자격 앞에선 늘 민망하고 어색했다.





그러다 어느 여행자의 일화를 듣게 되었다.

여행자는 유럽 어느 술집에서 한 바텐더를 만났는데,

바텐더는 여행자에게 자신을 시인이라고 소개했다고 한다.

그 말에 여행자가 “당신 이름으로 나온 시집이 있나요?”라고 물었고

바텐더는, “아뇨. 시집을 낸 적은 없지만, 시를 쓰기 때문에 시인이죠”

라고 답했다.





왜 나는 몇 권의 책을 내고도 작가라 불리는 것을 어색해하고,

다른 누군가는 시집 한 권 없이도

스스로를 당당하게 시인이라 부를 수 있었을까.





개인의 차이도 있겠지만, 그건 문화의 차이가 크다.

그 차이는 공교육에서도 보여진다.

개인의 개성과 자율성을 중시하는 서양에서는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는 것을 중요하게 가르친다.

《생각의 지도》의 저자 리처드 니스벳이 밝히길

그의 고향에서는 교육의 목표로 ‘지식을 전달하는 것’과

‘자존감을 심어주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중요한가에 대해

논쟁까지 있었다고 한다.

우리 입장에선 별게 다 논쟁거리다 싶기도 하지만

지식을 전달하는 것만큼 개인의 자존감을 심어주는 것을

교육의 중요한 목표로 두고 있는 것이다.





반면, 우리 사회는 개인의 개성보다는

집단의 조화를 중시하는 관계지향적인 사회다.

그래서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바른 생활>이라는 과목을 배우며 관계 맺는 법을 가장 먼저 익힌다.





사실 따로 가르칠 것도 없다.

요약하자면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누구와도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란 이야기.

우리는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고

자신의 감정을 존중하도록 교육 받기보다는

타인의 생각과 감정에 더욱 주의를 기울이도록 교육을 받았다.





영어에는 대응할 단어조차 없는 ‘눈치’가 한국인은 유난히 발달한 것도,

서양인이 보기엔 자기비하에 가까운 겸손도 이러한 문화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오랜 수련의 결과 사람들과 잘 어울리기 위하여,

주제파악 못하고 꼴값 떤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하여,

고도의 눈치와 겸손을 발휘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자격 앞에서 머뭇거린다.

물론 겸손도, 타인의 감정을 배려하는 것도 미덕이다.





그러나 그 가치는 타인의 눈치를 보며 주눅 드는 것이 아닌

타인에 대한 존중에 있을 뿐이고,

타인의 감정을 염려하느라 정작 자신의 감정은 돌보지 못한다면

그 무엇도 미덕이 될 수 없다.





그러니 당신이 지칠 만큼 눈치를 볼 필요도,

주눅 들 만큼 겸손할 필요도 없다.





당신이

가장 존중해야 하는 사람은

언제나 당신 자신이다.





+

약간의 근자감과

어느 정도의 개썅마이웨이 정신이 필요하다!





나의 삶을 존중할

권리를 말할 것





인터넷에서 어떤 글을 읽었다.

글쓴이는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는데,

손님으로 온 한 아주머니가 글쓴이를 가리키며

딸에게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고 말했다.

의문의 1패를 당한 글쓴이는 불쾌했다.

그녀는 경험을 쌓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는 것뿐이었고,

동료 역시 명문대를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마침 중국인 손님이 들어왔고,

중국 유학 경험이 있었던 그녀는 유창한 중국어로 주문을 받았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아주머니가 놀라며 겸연쩍어했다는 이야기였다.





이 글을 읽은 사람들은 그 아주머니를 비난했다.

하지만 과연 아르바이트생은 그 아주머니와 얼마나 다를까.

글쓴이는 계속해서 자신이 단순 노동자가 아니라

그저 경험을 쌓기 위해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임을 강조했다.

그녀의 절절한 항변은 아주머니의 언행 자체가 아니라,

‘내가 그런 취급을 당할 사람이 아닌 것’에 맞춰져 있었다.

한마디로 그녀는 억울하다.

자신은 경험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뿐,

공부를 안 해서 ‘저렇게 된’ 이들과는 다른 존재인데 말이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면 [자극 글귀]라는 것이 나온다.

“대학 가서 미팅할래, 공장 가서 미싱할래?”

“1~3등급은 치킨을 시키고, 4~6등급은 치킨을 튀기고,

7~9등급은 치킨을 배달한다.”





얼핏 들으면 라임 돋는 위트 있는 문장이지만,

이 텍스트는 치킨을 배달하는 삶,

공장에서 미싱 하는 삶을

공부하지 않은 형벌로 바라보게 하고,

땀 흘리는 노동을 비참한 삶으로 만든다.

그리고 이 텍스트 속에서 우리는 노동자에 대한 무시와 차별을

머릿속에 기본 OS로 장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차별의 뿌리는 결코 짧지 않다.

백성이 지은 농사로 먹고살면서도

그들을 천대하던 호랑맡코 같은 관료들이 심어놓은

관존민비(관리는 높고 귀하며, 백성은 낮고 천하다고 여기는 개소리) 직업관이

자본주의 위세 경쟁에 맞물려 새 버전으로 업그레이드된 것이다.

이 차별의 OS는 직업 간의 임금 차를 좁히지 못하게 하고,

그건 다시 차별을 강화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1.

이 문제는 단지 만인이 평등하다는

휴머니티 관점에만 있는 게 아니다.

아이들은 공부를 안 하면 저렇게 된다는 말을 듣고

온갖 자극 글귀를 읽으며

당연히 드라마 속의 커리어 우먼이나

비즈니스 맨이 되는 미래만을 그린다.





그러나 현실의 많은 이들이 육체 노동자로 살아가며

평범한 직장에서 을의 삶을 마주한다.





드라마 세트장 같은 곳에서만 살 줄 알았던 이들이

어린 시절 자신이 무시했던 삶으로 들어와 있다는 것.

그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나.





미래에 대한 과대망상과 차별의 OS가

평범한 자신에 대한 수치심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자신이 그들과 같다는 걸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것.

노동자 계급의 연대가 어려운 이유 역시 바로 여기에 있다.





2.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멸시의 부작용은 다른 쪽에서도 진행된다.

은근한 차별과 멸시를 품고, 치킨 배달을 하지 않기 위해,

공장에서 미싱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그 속에선 배움에 대한 유희와 호기심은 없다.

무시와 추락에 대한 불안을 동력으로 공부하고,

불안이 줄어들면 자극 글귀를 찾으며 불안을 충전할 뿐이다.

물론 일시적인 불안과 긴장감은 능률을 높이고 동기를 제공한다.

하지만 삶의 동력으로 불안과 긴장만이 남았을 때는

아로나민 골드로도 풀 수 없는 마음의 만성피로가 만들어진다.

부모가 자식의 행복을 위한다며 내뱉던 말들이

자식을 만성적인 불안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3.

그렇게 해서 원하는 곳에 닿으면, 만사가 형통할까?

차별과 멸시에 대한 공포로 얻은 성취에는 ‘오만’이 뒤따른다.

다른 내면의 힘 없이 오만만 증식되는 건

안전장치 없이 고층빌딩 위에 서있는 것과 비슷하다.

상시적인 고소공포증, 즉 추락에 대한 공포감만 커질 뿐이다.

게다가 오만이 클수록 추락의 충격도 클 수밖에 없다.





그걸 보여준 게 전 조선일보 논설고문 이규태의 글이다.

그의 글을 빌리자면, 유럽 사람들은 상황이나 사정이 바뀌면

그에 맞추어 자연스레 하향을 한다.

하지만 한국인은 사정이나 상황이 달라져도

하향은 끝내 하지 않으려 하고,

어쩔 수 없이 하향을 하게 될 때는 처참하고 처절한 심경에 빠진다.





인생이라는 게 이렇게도, 저렇게도 살 수 있는 것임에도

차별과 멸시가 내면화된 이들에게

하향이란 처절하고 비극적인 추락인 거다.

그렇게 차별은 손가락질 받는 이들은 수치스럽고

손가락질 하는 이들은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그 누구의 삶에도 도움되지 않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끊임없이 불안을 충전하고 있다면

혹은 당신이 꿈꿨던 미래와는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는

자신에게 수치심을 느껴야 한다면,

스스로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치킨 배달을 한다 해도 공장에서 미싱을 한다 해도

삶이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것일 뿐

그 어떤 삶도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열심히 사는 것도, 열심히 배우는 것도 마음껏 하시라.

하지만 누구의 삶도 모욕할 수 없다.





우리는

각자의 삶을 존중하며

살아갈 권리가 있다.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사랑받느니

차라리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으로 미움받겠다.

_ 커트 코베인





단단한 자존감을 다질 것





알랭 드 보통은 어른이 된다는 건 냉담한 인물들,

속물들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우리의 자리를 차지하는 의미라 했다.

살아보니 세상은 동화 같지 않다.

갑질에 분개하는 것이 새삼스러울 만큼 차별은 일상에 만연하고

속물의 조건적 관심에 의연한 척하며 무시하려 해도

마음은 주머니 속에 넣어둔 쿠크다스처럼 부서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존감을 높여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의 기준과 평가에 상관없이 스스로를 존중하는 마음을 키우라고.

그래, 말은 잘 알겠는데

그게 왜 말처럼 쉽지가 않을까.





자존감은 기본적으로

어린 시절의 경험과 부모의 양육 방식에 영향을 받는다.

부모와 애착 경험이 부족하거나, 학대, 조롱, 방치, 비난을 경험한 경우

자존감 문제에 시달릴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존감이 어린 시절 경험에만 평생 고착되는 것은 아니다.

살아가면서 변화한다.

자존감의 원리를 최초로 규명한 심리학자 나다니엘 브랜든은

건강한 자존감을 위한 두 기둥을

자아 효능감과 자기 존중감이라 이야기했다.

자아 효능감이란 자신을 돌보며 현실적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자기 신뢰이자 자신감이고

자기 존중감은 스스로를 존중하며

사랑받을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마음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존감을 적절하게 지켜낼 수 있는 사회에서 살고 있을까?

건강한 자존감을 가지고 자라왔다 해도 수십 장의 이력서가 거절당하고,

회사의 소모품이 되어 일자리에서 내몰리는 상황에

스스로 삶을 유지시킬 수 있다는 자아 효능감을 느끼기는 어렵다.





또, 조건으로 쉽게 서열을 나누며 차별을 권하는 사회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존중하라는 건

어쩌면 최면에 걸리자는 말에 가까울지 모른다.

세상은 자존감 없이는 버티기 힘든 곳으로 변해가는데

개인은 자존감을 세우기가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돌림노래처럼 반복되는 자존감 문제를 해결하고,

이 냉담한 세상에서 우리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그 첫 번째 방법은 사회적 존중이라는 자존감의 토양을 다지는 것이다.

존중이 희소성을 지닌 경제재가 될 필요는 없다.

사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존중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공공재가 된다면,

우리는 존중받으려 쩔쩔매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존중을 공공재로 만들자.

서로에게 존중의 연료가 되어주자.





직급에 따라, 연봉에 따라, 직업에 따라, 겉모습에 따라

선별적 존중을 보내는 것이 아닌,

자신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조건 없는

공정한 존중을 보내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자존감에 대해 보다 본질적으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진짜 자존감을 구분하며

자존감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자존감은 우월함에서 비롯된 우쭐함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인정받아서

얻어지는 일시적인 만족감도 아니다.





자존감의 본질은 자신에 대한 신뢰이자

행복을 누릴 만한 사람이라는 자기 존중감이다.

이건 정신승리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자신을 신뢰하긴 어렵고,

자신의 신념과 반대되는 삶을 살면서 자신을 존중하기도 어렵다.

자존감은 스스로가 믿고 존중할 내면 세계를 세우고

그 신념을 바탕으로 삶을 선택하고, 행동하며, 책임을 지는

삶의 일련의 과정에서 얻어지는 내면의 힘이다.





EBS 다큐프라임 <아이의 사생활>에서는

부모의 태도가 자녀의 자존감에 미치는 영향을 실험했다.

실험에 참가한 아이들에게는 퍼즐 조각이 주어졌는데

과제를 어려워하자 자존감이 낮은 아이의 부모는

대신 해결해주려 했고

자존감이 높은 아이의 부모는

아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자신에 대한 신뢰와 존중은

성공 경험이 축적될 때 생겨난다.





그리고 실험에서 보여주듯이

가장 중요한 건

그 주체가 자기자신이 되는 일이다.





스스로를 충분히 의식하지 못한 채,

타인과 사회의 시선에 질질 끌려 사는 것으론

결코 자존감에 닿을 수 없다.

그렇기에 단단한 자존감을 세우기 위한 첫걸음은 분명하다.

‘나답게 살아가는 것.’





그럼, 나다운 삶에 다가가는 법에 대해 알아보자.





+

빨로빨로미.





나다운 삶을 찾을 것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이 “너답지 않게 왜이래?”라고 말하면,

여자 주인공은 도끼눈을 하고 이렇게 대답한다.

“나다운 게 뭔데?” 그러게나 말이다.

나답게 살아야 한다는 건 익히 들어 알겠는데,

나다운 게 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왜 우리는 나다운 게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할까?





심리학자 제임스 마샤는 자아정체성의 성취 정도에 따라

정체성을 4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그 4가지 유형은 성취, 탐색, 폐쇄, 혼미 정체성인데

연구에 따르면 한국인은 대다수가 낮은 정체성 지위인

폐쇄지위(74.4%)에 놓여있었다.





폐쇄지위란 기존의 사회 가치 체계를 그대로 순응하고 전념한 유형인데,

이론에 따르면 지위가 낮은 정체성에 있는 이유는

위기의 부재에 있다.





인생에 위기가 없었다니, 뭔 소리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위기란 보이스피싱을 당하거나

소개팅녀 앞에서 카드 승인이 떨어지지 않는 일이 아니라,

목표, 가치, 신념에 대하여 자문하며 투쟁한 적이 없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투쟁하지 못했을까?

이는 자신에 대한 탐색과 자문의 과정을 권하지 않는

사회 문화에서 시작됐다.





과거 우리의 핵심 도덕이었던 유교에서 개인은

주변 환경과 관계 속에 상호의존적인 존재였다.

개인의 정체성은 역할에 따라 결정되었고,

자문과 탐색보다는 주어진 역할의 도리를 배우고

실천하는 것이 중요했다.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상에 맞추는 것을

아름다운 삶이라 여긴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만의 삶의 방식과 철학을 세우며 사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부모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춰 사는 것에 더 익숙하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자기가 좋아하는 일은커녕

자신에 대한 윤곽선도 그려내지 못하고

자소서 대신 자소설을 쓰게 된다.

그리고 이 상황을 끝까지 해결하지 못하는 것보다 결정적인 문제는,

지독한 의존심에 있다.





어린 시절, “너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어른의 말을 따라야 한다”는 말은

아이가 나약하고 열등한 존재임을 각성시켰다.

많은 부모는 아이의 나약함과 열등함을 이유로

자율성을 허락하지 않으며,

아이가 어른이 되는 [과정]을 빼앗았다.

[과정] 없이 어른이라는 [결과]만 남은 이들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 내리는 것을 두려워하기에

나이를 먹어서도 멘토를 찾아 다닌다.





그러나 혜민 스님도, 한비야도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지 못한다.

나답게 산다는 것은 경험과 탐색 속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법을 익히는 일이다.





프리랜서가 된다고 해서 나다운 것이 아니고

특이한 취향을 가졌다고 해서 나다운 것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며 삶을 일구는 것이 나다운 삶이다.

그 시작을 위해선 당신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당신에 대한 글을 써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나는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가치를 실현하며 살고 싶은지

무엇에 행복해지는 사람인지

나는 남과 어떻게 다른지

[자기 감각]을 찾자.





물론 많은 양의 지성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의존심을 버린다는 게 두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고민과 위기의 순간을 지났을 때,

비로소 스스로가 신뢰하고 존중할 수 있는

나다운 삶이 시작될 것이다.





더 이상 삶의 질문을

유예하지 않을 것





혹독한 경쟁 속에서

우리는 일단 공부하고, 일단 대학에 가고,

일단 좋은 스펙을 다지고, 일단 돈을 번다.

그렇게 아침부터 밤까지,

봄부터 겨울까지 해야 할 일에 쫓기며 어른이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이야기를 한다.





“내가 좋아하는 일이 뭔지 모르겠어요.”





그런 그들에게 되묻고 싶은 질문은,

“좋아서 해본 일이 있나요?”





오랫동안 해야 하는 일들에 매몰되어

자신의 욕구를 억눌러온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자신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된다.





자신이 원하는 삶은 영원히 발견되지 않은 채,

미지의 영역으로 남는 걸 원치 않는다면

자신의 감각을 일깨우자.





해야할 일에서 벗어나

당신이 원하는 일을 찾자.

이제 유예했던 삶의 질문들에

답해야 할 순간이다.





당연했던 것에

질문할 것





한 마을에 부부와 시어머니, 한 살배기 아들이 살고 있었다.

밭일을 나간 며느리가 점심때가 되어 돌아오니

치매 걸린 시어머니가 닭죽을 끓여 놓았다고 했다.

감사한 마음으로 솥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닭이 아닌 아들이 들어있었다.

시어머니가 손자를 닭으로 착각하고 가마솥에 넣어 삶은 것이었다.

이를 본 며느리는 마음을 추스른 다음

닭을 잡아 시어머니께 닭죽을 끓여 드리고, 죽은 아이를 뒷산에 묻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올 만한 이 아이 유기 사건은

놀랍게도 조선시대에 효부상이 세워진 미담이다.





지금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가

아름다운 이야기로 전해질 수 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에는 개인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억압하고

도리라는 이름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미덕이었고,

이것은 아무리 울화가 치밀어도 화합을 위해

희생을 강요하는 통치 이데올로기였다.

나의 어린 시절에도 미덕이 있었는데 바로 근면 성실이었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몸이 아프거나 다쳐도

빠짐없이 학교에 가면 개근상장을 줬다.

칠판 위에는 ‘근면 성실’이라는 급훈이 쓰인 액자가 걸려있을 정도였다.

근면 성실을 최고의 미덕으로 배운 건

우리 사회가 제조업 기반의 사회였던 것에 있다.

제조업에서는 창의력이나 개성보다

근면함과 성실함이 가장 필요한 자질이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선별되고 교육되는 미담과 미덕으로

아이가 솥에 삶아져 죽었는데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며느리는

감정 불구의 아동학대방조범이 아닌 의연한 효부가 되고,

열이 펄펄 끓어도 학교에 나오는 학생은 타의 모범이 되며,

소크라테스가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했다는 유언비어가 퍼지기도 하고,

이슬람 국가에선 자유연애를 한다는 이유로

딸을 죽이는 것이 명예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사회가 선별해서 미덕으로 심은 통념은

때론 괴담을 미담으로 만들고, 폭력을 명예로 만든다.





우리가 따르고 있는 통념은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며

우리 삶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한 건

어느 순간 주입된 통념이 아닌 스스로가 세운 신념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경제학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유학을 갔던 이의 말에 따르면,

미국 대학에는 브레인 워싱 클래스(Brain Washing Class)라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내용인 즉, 지금까지 배운 경제학 지식은 모조리 틀렸으니

두뇌를 세척하자는 수업이었다.





우리가 세계적인 석학들의 경제학 이론이 무엇인지 배울 때,

그들은 그 이론의 어떤 점이 틀렸는지를 찾아냈고,

그렇기에 새로운 답을 찾을 수 있었다.





우리, 당연했던 것들에 질문하자.

당신이 믿어온 것이 정말 당신 내면의 목소리인지

아니면 어느 순간 의심 없이 따라온 타인의 목소리인지 묻자.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수의 통념이 아닌 자신의 신념이다.





통념의 자리에 우리의 신념을 채우기 위해

우리에게도 브레인 워싱 클래스가 필요하다.





+

얼마 전 고용노동부에서 운영하는 사이트에

휴가지에 가서도 바이어와 미팅을 완수한

김 대리의 이야기가 훌륭한 사례로 올라왔다.

휴가 간 직원의 사적 생활을 방해한 회사를

고발해도 모자랄 판에 어디서 개수작이야.





누구의 기대를 위해서도

살지 않을 것





나는 회사를 다니지 않는다.

대단한 포부나 큰 결단이 있었던 건 아니다.

쓰고 싶은 글이 있었고, 회사를 다니는 문제는

일단 책을 쓰고 나서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다 문득, 난 어떻게 그런 중요한 결정을 이리 쉽게 내릴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그럴 수 있었던 건 부모님의 양육방식 때문이었다.

나는 살면서 부모님의 강요에 부딪친 적이 없었다.

내가 어떤 선택을 내릴 때 의견을 주시긴 했지만,

결국은 내 선택대로 할 수 있게 해주셨다.

게다가 중학교 시절까지 공부는 안하고 만화책만 본 나와 달리

언니는 전교 1, 2등을 하는 우등생이었지만

단 한 번도 언니와 비교당한 기억이 없다.

그 덕분에 나는 부모님에게 인정받지 못할까 두려워하지 않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것에 익숙했다.





물론 그런 내게도 부모님에게 좋은 모습을 보여드려야 한다는

부담감은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 부담감도 일찍이 잘라냈는데

부담감이 크다고 사랑까지 큰 건 아니라 생각해서였다.

20대 중반 무렵, 밥을 먹다가 부모님에게

“나한테는 기대를 버리고 하숙생이라 생각해요”라고 말했다.





당연 쌍욕을 먹었으니.

기껏 키워놨더니 그게 할 소리냐고 하셨다.

하지만 그 뒤로도 계속 날 하숙생으로 생각하라고 말했다.

물론 나라고 왜 수지 같은 딸이 되고 싶지 않겠는가.

가능하다면야 나도 부모님께 유자식상팔자를 보여드리고 싶고

그게 안 된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마음이다.

하지만 내가 부담감에 짓눌려 산다고 부모님이 행복한 것도 아니고

부모님을 실망시키는 건 아닌가 안절부절 못한다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우리는 그저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고 살아갈 뿐이다.

그 삶이 부모님 기대에 맞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건

사랑이 아닌 채무감이자 강박일 뿐.

내 삶을 책임지는 것이 나의 몫이라면

자식이 부모 마음대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건 부모님 몫이다.





우리를 짓누르는 것이

부모님에게 받은 경제적인 지원에 대한 채무감이라면

살며 최선을 다해 갚으시라.

하숙비를 내야 하숙생이 되는 거다.

하지만, 우리 삶까지 저당 잡혀 살지는 말자.





우리가 기대에 부흥하기 위해 애써야 할

유일한 존재는 나 자신뿐이다.





나 외엔

무엇도 되지 않을 것





초등학교 2학년 때, 장래희망을 말하는 시간이 있었다.

나는 퀴리 부인에 대해 어디선가 주워듣고는

퀴리 부인과 같은 여성 과학자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실상 나는 정자와 난자 시절부터

과학자와는 거리가 멀게 태어난 사람이지만,

초등학교 2학년의 나는 그런 공수표를 남발해도 괜찮았다.

아홉 살짜리 꼬마가 구체적으로 물류회사에서 구매를 담당하고 싶다거나,

중견회사에서 회계관리를 하고 싶다고 하는 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문제는 나이를 먹어서도 우리의 꿈이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이 될 것인가’에 머물러 있을 때 발생한다.





예전에 한 피부과 의사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는 서울에 있는 의대를 나와 강남에서 피부과 전문의를 하고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동안, 의사가 아닌 한 개인으로서

그에게 어떤 개성이나 철학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성장하지 못한 아이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문득 그에게 지금 행복하냐는 질문을 했다.

그러자 그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아니”라고 답했다.

남들이 보기엔 그럴듯한 직업을 가졌다고 할 수 있겠지만

더 좋은 학벌에, 더 큰 병원에서 일하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할 뿐이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

실제론 행복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더니

그가 그런 사람이었다.





열심히 공부하는 것에 매달려 청소년기를 보냈던 그는

‘의대에 갈 수 있어서’ 의대에 갔다고 한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는 없었고

대학에 가서도 빡빡한 의과 공부와 인턴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는 왜 행복하지 않을까?

그는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안정, 주변 사람들의 인정을 좇으며,

자신의 내면은 바라보지 못했고, 그것은 그의 내면을 공허하게 만들었다.





그런 그에게 중요했던 건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자신의 공허한 내면과 희미한 정체성을 채우기 위해

의사라는 직업적 정체성에 기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행복하지 않았다.

의사가 되면 해결될 거라 여겼지만

더 큰 병원과 더 높은 연봉과 더 좋은 배경에 붙잡혀 있을 뿐.

텅 빈 내면은 어떤 외적 가치로도 채워질 수 없었다.





물론 한 개인에게 직업은 단순히 돈벌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직업이란, 보다 자기다워지는 일이지

없는 자아를 창조하는 일은 아니다.

시작이 되는 눈 뭉치가 있어야 눈덩이를 굴릴 수 있다.





내면은 돌보지 못한 채 외면의 가치만을 쫓는 한

언제나 비교 속에서 살 뿐.





우리에게 절실한 건, 우리를 증명할 명함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증명할 필요 없는 나 자신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정답에

굴복하지 않을 것





동네 커피숍에서 우연히 초등학교 원어민 강사인

캐나다인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녀는 내게 우리나라에 와서 이상하게 느낀 점을 이야기했는데,

한국 사람들은 Smart student를 Good student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봤을 땐 공부를 못해도 Good student일 수 있고,

공부를 잘해도 Good student가 아닐 수 있는데 말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Smart = Good이라는 등식에

그녀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잘 산다’의 의미 역시 비슷한 맥락을 갖는다.

‘잘 산다’고 할 수 있는 요소에는 경제적인 기반 외에도





건강한 신체와 좋은 인간 관계,

삶의 철학과 예술을 즐길 수 있는 심미안,

일을 통해 느끼는 보람 등 다양한 가치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잘 사는 것, 웰빙(Well being)이란

오직 부자인 삶, Rich의 의미로만 이야기된다.





왜 우리는 그 많은 가치들을 잊은 채

한 가지 가치로만 수렴하도록 프로그래밍된 것일까?





아마도 6ㆍ25 심성*과 반공 이데올로기가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테다.

더는 침략당하지 않고, 절망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던 6ㆍ25 심성은

두발단속과 통금시간이라는 군대식 문화와 획일화된 통제를 따르게 했고,

반공 이데올로기는 다른 답을 논하는 것 자체를 불순하게 만들었다.

집단이 강요하는 한 가지 방식과 한 가지 답을 견뎌온 것은

어떻게 해서든 살아남아야 했던 우리의 생존방식이었다.





이렇게 뿌리내린 생각의 방식은 몇 세대를 걸쳐 이어졌다.

‘100억 달러 수출, 1000달러 소득’ 같이

계량화한 한 가지 목표에 매진하게 했던 사회 방식은





‘5kg 감량, 토익 900 달성’ 같은 개인의 삶의 방식으로 자리 잡았고,

획일적인 사회 모습은 한가지 답을 좇는 개인의 모습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는 체지방 17%에 48kg이어야 하고,

밝고 겸손한 성격이어야 하며, 좋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가야 한다.





높은 기준의 단일화된 정답을 이야기하며

정답에 대한 병적인 찬사와 오답에 대한 노골적인 모욕을 서슴지 않는다.

그 속에서 졸지에 오답이 된 개인은

혼자 힘으로 그 부적절함을 견뎌야 한다.





그 결과 우리에겐 정답이 된 소수의 오만과

오답이 된 다수의 열패감으로 응축된 병적인 사회가 남았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다니엘 튜더는

한국이 교육, 명예, 외모, 직업적 성취에서

스스로를 불가능한 기준에 획일적으로 맞추도록

너무 큰 압박을 가하는 나라라 이야기 하며,

이룰 수 없는 목표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한국을 불가능한 나라(The impossible country)라 평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나’는 과연 가능한(Possible) 존재인가.





모두가 날씬할 수 없고, 모두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성격일 수 없고,

모두가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갈 수는 없다.

아니, 모두가 그렇다면 그거야말로 은하철도 999에 나올 법한

비정상적인 행성일 뿐이다.





만약 사회가, 세상이

당신에게 어떤 정답을 강요한다면 당신은 그 이유를 물어야 한다.

합당하지 않은 정답에 채점되어 굴복하지 말아야 하며

그 정답들에 주눅 들어 스스로의 가치를 절하해서는 안 된다.





좋은 학생에는 여러 정의가 있고

잘 사는 것에는 여러 방법이 있으며

우리는 각자의 답을 가질 권리가 있다.

우리는 오답이 아닌, 각기 다른 답이다.





* 6ㆍ25 심성 : 강준만 교수는《 한국인 코드》라는 책에서 6ㆍ25 전쟁 시절을 살듯이 ‘죽느냐 사느냐’ 식의 처절한 삶을 살고 있는 한국인의 삶을 이야기하며, 전쟁하듯 세상을 살고 있는 한국인 의식 심연에 자리 잡은 그 무엇을 ‘6ㆍ25 심성’이라고 표현했다.





안목을 기를 것





20대 초반에 인생의 노하우 같은 것을

모아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중 한 꼭지는 저렴한 옷 여러 벌을 사지 말고

한 벌의 좋은 옷을 사라는 이야기였다.





시간이 지나 옷장을 보니 그 말이 떠올랐다.

세일한다고 무작정 산 겨울 코트와

내 몸은 생각하지 않고 쇼핑몰 피팅 모델 사진만 보고 산 치마와

현관에서 엄마의 블로킹을 피할 수 없는 과감한 옷이 쌓여있었다.

그렇다고 지난 쇼핑을 후회하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그땐 여러 옷을 입어보고 실패하며

내게 어떤 스타일의 옷이 어울리는지

어떤 옷을 골라야 하는지 취향과 안목을 만들어가는 시기였다.





만약 당신도 여러 번의 실패를 경험했다면

그만큼 잘 어울리는 옷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다는 의미다.





그러니 이제 실패를 통해 길러낸 안목과 취향으로

내게 가장 좋은 한 가지를 찾아내자.





삶이란 결국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질 좋은 옷 한 벌을 찾는 일이다.





+

그녀에겐 단발머리가 진리라는 사실은

그에겐 댄디룩이 가장 잘 어울린다는 사실은

내겐 살구색 블러셔가 잘 맞는다는 사실은

새로운 시도를 통해 발견됐다.





스스로 선택할 것





인생은 B(Birth, 탄생)와 D(Death, 죽음) 사이의 C(Choice, 선택)라는

한 철학자의 말처럼 우리가 어떤 선택을 어떻게 하는가는

우리의 인생을 결정한다.





그런데 주위엔 선택을 유난히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중한 것과 결정하지 못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인데

그들은 왜 선택을 내리는 걸 어려워할까?

그건 완벽한 답을 얻으려는 강박일 수도 있으나

스스로의 판단을 믿는 자기 신뢰가 부족한 경우가 많다.





선택을 내리는 자신을 믿지 못하고,

선택에 따르는 책임을 감당할 자신이 없으니,

다른 사람이 답을 내려주기를 기대하거나,

문제가 곪을 때까지 선택을 유예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건 단순히 시간 낭비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나다니엘 브랜든이 말하길, 선택들은 정신 깊은 곳에 쌓이고

그렇게 쌓인 결과를 자존감이라 부른다고 했다.

삶에서 자신이 내리는 선택이 모여

자존감을 이룬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자신의 삶을 통제할 수 있다는 자기 신뢰는

절대 실패하지 않을 거라고 믿을 때가 아니라

스스로 결정을 내리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 결과까지 책임질 때 얻어진다.





그런데 스스로 선택을 내리지 못하면,

자기 신뢰를 쌓을 경험은 빈약해지고

빈약한 자기 신뢰로는 책임질 자신이 생기기 어렵다.





선택과 책임, 자기신뢰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기에

어느 하나 삐걱거리지 않고 굴러갈 때

우리는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그리고 그 삶의 방식은 자존감으로 나타난다.





그러니 제갈공명이 옆방에 살지라도

우리의 결정권을 위임해서는 안 된다.

오직 과거라는 당신의 데이터베이스와

실수라는 오답노트 그리고

내면의 나침반을 믿고 나아가야 한다.





삶에 완벽한 답안지는 없으나

어떤 답을 내리든 스스로 책임질 수 있다면

당신의 모든 선택은 정당하다.





개인의 취향을 갖출 것





예전 남자친구는 아트센터에서 하는 공연 티켓을

정기적으로 구매해 관람하길 좋아했다.

대부분 해외에서 초청된 공연으로 현대무용이나 행위예술 같은

공연이 많았는데, 그는 여자친구인 내가 함께 가길 원했다.

하지만 나는 몇 번을 가도 플라멩고 공연을 제외하곤 재미가 없었다.

내게는 사람들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거기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내 취향이 아닌 것 같으니 이제 다른 사람과 가라고 했다.





이건 예술 공연의 가치를 폄하하겠다는 뜻이 아니다.

누군가는 현대무용을 보며 감탄하고,

누군가는 원피스 피규어를 보며 감탄하고,

누군가는 HBO의 왕좌의 게임을 보며 감탄한다.





어떤 이들은 취향에 고하를 나누고

같은 취향을 강요하는 실수를 저지르지만

취향의 차이는 누가 더 열등하거나 우월해서가 아니며

강요할 수 있는 영역도 아니다.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취향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자기 감각에 솔직해져야 한다.

타인의 평가나 시선에 강요받거나

SNS에 인증하기 좋은 것을 쫓아다녀서도 안 된다.

자신의 취향을 깊이 느끼기 위해

안목을 키우는 노력도 필요하지만,

취향 자체는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나는 공연보다는 전시가 좋고

슬픈 영화보다는 유쾌한 오락 영화가 좋고

스테이크와 와인의 조합보다는 돼지갈비와 비냉의 조합이 좋다.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건

자기소개서 ‘취미’란에 적어낼 그럴듯한 취향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개인의 취향일 뿐이다.





삶의 멋과 낭만은 그곳에 있다.





진짜 나 자신을 대면할 것





누군가를 싫어한다는 건 꽤 피곤한 일이기에,

학창 시절, 내 고민은 싫어하는 친구가 계속 생기는 것이었다.





한번은 고등학교 때 한 친구와 싸웠는데,

그 친구와 나는 같은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었다.

내신 성적에 들어가는 동아리 장을 하고 싶어 했던 친구는 선생님에게 가서

동아리 장을 하고 싶다고 말한 뒤,

내겐 선생님이 먼저 시켰다고 거짓말을 했다.





나는 그런 친구가 이기적이라고 느꼈다.

그런 몇몇 가지 일이 쌓인 후 나는 그 친구와 멀어졌고

그 뒤로 그 친구를 보면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했다.





나이를 먹고 그때의 나를 떠올리며

왜 굳이 싫은 티를 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이면 그냥 멀어지면 그만인데 말이다.





하지만 내가 철이 없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친구는 좀 싫어할 만한 면이 있었고,

누군가를 싫어하는 건 인간적인 범위 안에 들어가는 실수라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과거를 곱씹다가

나의 잘못은 언제나 인간적인 실수 안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왜 그 친구의 잘못은 인간적인 실수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사실 이기적인 마음이야 누구나 있고

당시의 내가 철이 없던 거라면

그 친구 역시 그저 철이 없던 건데 말이다.





그동안 나는 내가 좋아하는 면들만 ‘나’라고 생각했다.

이기적인 친구를 욕하며 나는 이기적인 면이 없는 완전한 사람처럼 굴었고,

내가 좋아하지 않는 나의 다른 면들이 드러날 땐

(못 본 척), (모른 척) 지나갔다.

내가 좋아하지 않는 면들은 내가 아닌 척 위장했던 거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 얼마나 오만했는가.





분석심리학의 창시자 칼 구스타브 융은 개인이 숨기고 싶어 하는

성격의 총합을 ‘그림자’라 이야기하며, 누구나 그림자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림자는 완전히 제거될 수 없으며

건강한 내면을 갖기 위해서는 그림자와 화해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했다.





우리는 한 사건에 대하여 한 가지 감정만 갖는 게 아니며

누구나 인정하기 싫은 찌질함과 이기적인 마음, 흑역사가 있다.

그런데 내면의 그림자가 보기 싫다고 인정하지 않으면

자기 개념은 뒤죽박죽이 되어

진짜 자신을 인식할 수 없게 되고 통제할 수 없게 된다.





우리가 보다 건강한 내면을 키우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족한 모습까지 자각하고 수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니 자신의 싫은 면들도 인정하자.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만날 때

감춰둔 욕망의 허용치를 둘 수 있고

그 허용치만큼 자신에 대해서도

그리고 타인에 대해서도 관대해질 수 있다.





외면과 변명을 멈추고

내가 좋아하는 나와 내가 싫어하는 내가 통합된

진짜 자기 자신을 대면하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오만한 인간이 아닌,

인간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





+

우리는 누군가가 완벽하지 않아서 싫어하지 않는다.

완벽한 척하는 그 오만함에 질리는 거다.





자신이 빛날 수 있는

자리에서 살아갈 것





중학생 때 친구와 관공서로 봉사활동을 갔다.

그때 우리에게 주어진 일은 서류 항목을 리스트로 정리하고

몇몇 숫자들과 대조하며 오류가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숫자와 친하지 않았기에

서류들을 보는 순간 피곤해졌다.

지루함을 견디며 굼벵이 속도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함께 갔던 친구는 그사이 문서 정리를 깔끔히 끝내고는 “재밌다”고 말했다.

그런 친구가 신기해서 물으니,

오류를 찾으며 하나하나 정리해가는 것에 성취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 뒤 친구는 세무학과에 진학했고, 지금은 세무서에서 일하고 있다.

어디서든 일 잘하고 꼼꼼한 직원으로 평가받을 게 분명하리라.





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존중하며 살아가기 위해선

자신의 재능에 대한 이해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직업 선택이 중요하다.

그렇지 못했을 때 견뎌야 하는 건 일의 고단함뿐 아니라,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재능을 찾으라 하면

예술적이거나 특수한 직업만을 떠올리기도 하고

엄청난 재능만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듯하다.

그 생각에 갇히면

자신의 재능과 장점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지 못하게 된다.





재능의 크기는 점점 늘려갈 수 있는 것이고,

그 크기에 따라 다른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이 신춘문예에 도전할 필요는 없다.

재능의 크기보다 중요한 건, 자신이 어떤 재능을 가지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재능이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는 재능이란, 어떤 일을 남들보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건 몇 가지 재능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어떤 이에겐 서류를 잘 정리하는 게 재능이고

어떤 이에겐 모르는 사람과도 즐겁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게 재능이고

어떤 이에겐 눈썰미가 좋은 게 재능이고

어떤 이에겐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게 재능이다.

이러한 재능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쉽게 눈에 띄진 않는다.

그렇기에 자신의 재능과 장점을 발견하기 위해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고,

자신의 재능에 [적합한] 직업 혹은 자리를 찾아야 한다.

당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남들보다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 적어보자.

잘 모르겠다면 인터넷을 통해 다중지능검사를 해볼 수도 있다.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자기 자신을 알아가야 한다.





당신이 원하는 것과 잘할 수 있는 것 사이의 교집합을 찾자.

물론 쉽지 않을 것이고, 시간이 걸릴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 그 정도의 관심과 노력조차

기울일 생각이 없다면,

타인은커녕 스스로의 존중도 얻기 어려울 것이다.





걱정은 내일의 슬픔을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힘을 앗아간다.

_ 코리 덴 붐





삶이라는 모호함을 견딜 것





나는 점 보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데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그 호기심을 풀어준 것은 <이영돈 PD가 간다>라는 프로그램이었다.





‘대한민국 10대 점술가를 검증하라’ 편에서

제작진이 전국에 내로라하는 점쟁이들을 찾아가 직접 검증했다.

검증 방법은 연쇄살인마의 사주와 어린 나이에 납치를 당해

살해당한 아이의 사주를 점쟁이에게 묻는 것이었다.

그중엔 신기할 정도로 용한 점쟁이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사실과 전혀 딴판인 이야기를 했고,

제작진의 첫 번째 검증 관문을 통과한 점쟁이는 겨우 6명에 불과했다.

그나마도 2차 관문에서는 2명밖에 통과하지 못했고,

끝판왕이던 점쟁이조차도 자신의 점괘를 100% 확신하지는 않았다.

천만 원이 넘는 복비를 들였으니,

적어도 100명이 넘는 점쟁이를 만났을 텐데 딱 들어맞는 점괘는

고작 몇 개에 불과했던 거다.





결국 점이라는 건,

홍삼가루가 5% 첨가된 홍삼 캔디처럼

약간의 진실이 함유된 추측일 뿐이다.

우리는 삶에 확신을 얻고 싶어서 점을 본다.

하지만 노스트라다무스가 관 뚜껑을 열고 나온다 해도

미래는 장담할 수 없다.

그건 점쟁이의 내공이 부족해서 혹은 복채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삶의 본질이 모호함에 있기 때문이다.





확신이 필요한 당신에겐 미안하지만

10년 동안 타로, 사주, 신점을 가리지 않고

숱한 기여를 하고 내린 결론을 말하건대

삶이란 결국, 모호함을 견뎌내는 일이다.





+

결국, 점보는 이유는

다 잘 될 거라는 그 한 마디를 듣기 위해서다.

“다 잘 될 거예요.”

점쟁이 대신 믿으시게. 자신의 힘을.





문제를 안고도

살아가는 법을 배울 것





살다 보면 원치 않은 일들이 일상 위로 투하될 때가 있다.

그리고 어떤 일들은 딱히 해결책이 존재하지도 않는다.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일. 과거의 실수가 현재의 발목을 붙잡는 일.

오랜 시간 돌보며 그때그때 덧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하는 일.

그런 일들이 들이닥칠 때, 손상된 삶 따위는 내팽개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인생도 닌텐도 게임처럼 리셋하고 다시 시작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번 생은 망한 것 같으니, 죽은 듯이 살아가야 할까.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끝에는 ‘그래도 나는 살아가고 싶다’는 결론에 닿았다.

몇 가지 사건들로 내 삶 전체를 포기하는 건 너무 억울했고,

남들이 보기엔 내 삶이 별거 아닐지라도 내겐 전부이므로.

드라마 <또 오해영>에서 해영의 말처럼,

나는 여전히 내가 애틋했고 내가 잘되길 바랐다.





당신도 그럴 수 있다.

너무 지쳐서, 내 자신이 지긋지긋해서, 감당하기 힘들어서,

그런 나 자신을 내팽개치고 싶을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아닌 누구도 내 삶을 대신 돌봐주지 않는다.

상처가 생겼다는 이유로,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이유로,

누구의 돌봄도 받지 못한 채 내 삶이 홀로 울고 있다면

그건 너무 미안하지 않은가.

그러니 살다가 어떤 불행을 마주한다 해도

충분히 슬퍼하고 괴로워했다면

그 원치 않는 사실과도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익히자.





당신의 고단함이 별것 아니라서

혹은 다들 그렇게 사니까, 같은 이유가 아니라

당신에겐 가장 애틋한 당신의 삶이기에

잘 살아내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자신만의 문제라고

착각하지 말 것





우리는 어릴 때부터 금실 좋고

무한한 사랑을 주는 부모님이 있는 집을

정상적인 가정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렇게 완벽한 부모님이 얼마나 될까?

미디어가 보여주는 연출된 모습과

사람들이 겉으로만 보여주는 그럴듯한 모습을 보며

무엇 하나 결핍되지 않은 이상적인 상태가 정상이라 착각한다.

그리고 그 착각의 결과,

(남들이 알지 못할 뿐) 보통의 개인은

(사실) 자신은 부족한 존재라 여기며

내면의 가장 밑바닥에 열등감을 숨겨놓는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건 과연 무엇일까?

소수인 쪽이 비정상이 되는 걸까?

한 톨의 결핍도 없는 상태가 정상이라면

과연 결핍 없는 삶은 존재하는가?

프로이트가 규정한 정상의 기준이

약간의 히스테리, 약간의 편집증, 약간의 강박증이듯

정상이란 완전무결한 것이 아니라

약간의 상처, 약간의 결핍, 약간의 부족함을 의미할 테다.

삶에는 여러 형태가 있으며

우리는 각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소수의 존재들일 뿐.





(사실) 당신이 어떤 가정 환경에서 자랐건

(사실) 당신이 어떤 문제와 결핍을 가졌건

그 무엇이건 착각하지 마라.

다 정상이다.





+

사람들은 불행을 꽁꽁 숨겨두기에 모를 뿐

세상에 보편적이지 않은 불행은 없다.





미래에 대한

엉터리 각본을 쓰지 않을 것





한동안 별일 아닌 일에도 걱정을 반복한 적이 있다.

미리 걱정을 해두면 막상 문제가 벌어졌을 때

안도감이 들어서 그랬다.

예를 들어 기침이 계속 나와 폐병을 걱정하며 병원에 가면

독감쯤은 다행스럽게 느껴지는 것처럼

안도감을 얻기 위해 과장된 걱정을 했던 거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건 신기하게도 중간 과정 없이 반복돼서

나중에는 기침만 해도 폐병에 걸린 듯 벌벌 떨게 된다.

그렇게 지나치게 왜곡된 걱정은 습관이 되고

최악의 상황을 홀로 리허설하며 탈진하게 된다.





그런데 일어나지 않은 일을 앞서 걱정하는 건

전쟁이 일어날까 두려워 땅굴에서 살거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당장 쓰지 않을 물건을 대량 구매해 놓는 것과 같다.





삶의 낭비이자 비합리적인 일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이 낭비를 줄일 수 있을까.

걱정은 대체로 비합리적이고 지나치게 부정적인 생각에서 촉발된다.

그렇기에 과장된 걱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막장 드라마 급의 개연성을 가진 왜곡된 생각을

바로잡는 것에서 시작한다.





당신의 걱정을 들여다보자.

일어날 확률이 낮은 최악의 경우를 떠올리고 있지는 않은가?

겨우 기침을 단서로 폐병을 염려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 날조된 미래에 붙잡혀 지금을 망치지 말자.





당신의 괴로움은 당신이 쓴 엉터리 각본 때문이다.





진짜 해결책을 찾을 것





사람에게는 마술적 사고라는 원시적 사고가 있다.

예를 들면 일기예보가 없던 원시시대엔

비가 멈추지 않거나 태풍이 불어닥치는 일은

갑작스럽고 두려운 일이었다.

원시인들은 신이 노한 탓에 비가 그치지 않는다고 생각해

처녀를 재물로 바쳤다.

사실 비는 때가 되면 그칠 테고,

그들의 재물은 결코 비구름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음으로써 안심한 거다.

이렇듯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서 생겨난 불안과 두려움,

공포를 달래기 위해 동원되는 것이 바로 마술적 사고다.





나도 때묻지 않은 어린 시절, 학교에서 반공 교육을 배운 뒤

1년 동안 잠들기 전에 전쟁이 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한 적이 있다.

나의 기도가 국제 정세에 어떤 영향도 끼칠 수 없음에도

기도를 하면 전쟁이 나지 않을 거라고 믿은 것이다.





우리는 원시인 혹은 열 살짜리 꼬마가 아님에도,

여전히 마술적 사고에 기댄다.

홍수를 막기 위해 처녀를 재물로 바쳤던 것처럼

전쟁을 피하기 위해 매일 밤 기도를 했던 것처럼,

자신이 통제하기 버거운 일 앞에서

그보다는 쉬운 가짜 해결책을 믿고 안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출금의 압박을 이겨내기 위해 굿을 하기도 하고,

데이트 폭력을 일삼는 남자친구의 변명을 믿기도 하며,

문제가 현실에서 나타나고 있는데도 모른 척하기도 하고,

행복과는 상관없는 일에 맹목적인 노력을 기울이기도 한다.

그러나 가짜 해결책으로 도망칠수록 진짜 해결책에 다가서지 못하고,

본질적으론 어떤 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으리라 믿고 싶지만,

미뤄놓은 숙제를 잠든 사이에 요정들이 대신 해주지 않듯이

시간이 해결해주지 않는 문제도 있다.





만약 당신이 어떤 지점에서 계속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그동안 가짜 해결책에 매달리고 있던 건 아닌지

문제의 실체를 제대로 마주하지 못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

결국은 두려웠던 문제의 실체와 마주하고

걱정을 계획으로 치환시켜야 한다.

물론 그 시간이 버겁고 힘들 수 있다.





하지만 진짜 해결책을 위해 발을 내디딜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자유로워질 수 있다.





+

광복, 당신 내면에 의식의 빛을 되찾는 일.

오랫동안 붙들려 있던 당신에게 해방을.





과민해지지 않을 것





친구가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멈춰있던 차가 갑자기 달려들었다고 한다.

초보운전자의 실수였는데 다행히 크게 다치진 않았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은 후

길을 건널 때면 차가 멈춰있어도 불안했다.

불안이란 과거의 부정적이고 공포스러운 경험으로 인해

다시 그 일이 반복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예감이다.

산전수전을 다 겪으면

웬만한 일에는 의연한 어른이 될 것 같지만

부정적 경험의 누적량도 많아지기 때문에

나이가 먹을수록 불안감도 커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 부정적 경험은

친구의 사고에서 불안감이 전이됐던 것처럼,

간접적으로도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우리는 불안할 일이 너무 많은 세상에서 산다.

미디어에서는 각종 사건 사고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건강정보방송을 보면 예방하고 조심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고,

불안정한 경제는 삶의 무엇도 보장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날 서있고, 또라이는 넘쳐나며,

가습기 살균제가 ‘살균’이 아니라 ‘살인’을 하더라.





이렇게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들은’ 우리는 과민하고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쉴 새 없는 불안으로 과민해졌다.

그리고 과민해진 마음은

실제로 벌어진 상황과 우리가 생각하는 것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별일이 아닌 상황에도 비상사태가 일어난 듯 안절부절못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이제는 이시형 박사의 《둔하게 삽시다》라는 책 제목처럼

조금 둔해질 필요가 있다.





지나치게 과민해진 스스로에게 이야기해야 한다.

과거에 일어난 별개의 일일 뿐이고

꼭 나쁜 쪽으로 흘러가리란 근거는 없으며

낮은 가능성까지 하나하나 염려하며 살 수는 없다고.





긴장을 풀고 당신의 머릿속 세계가 아닌

진짜 당신의 세계로 귀환하라.

당신이 실제로 경험한 삶은,

당신의 생각보다 평화롭다.





충분히 슬퍼할 것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과 이별한다.

때론 소중한 사람과 이별하고,

사랑받지 못한 채 지나가버린 어린 시절과 이별하고,

자신이 품었던 이상과 이별하고,

젊음과 이별하며,

자신이 믿어온 한때의 진실과 이별한다.

이 모든 이별에는 길든 짧든 애도가 필요하다.





애도란 마음의 저항 없이 충분히 슬퍼하는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고통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억지로 외면하거나 억누르고

혹은 자신의 마음을 미처 이해하지 못해

자기 자신에게 슬퍼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충분한 애도를 하지 못했을 때,

우울증이 발생한다고 했다.





감정이란 건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도록 틀어막는다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기에

애도의 과정을 거치지 못한 상실은 씻겨 내려가지 못한 채,

우울이라는 웅덩이로 고이고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만약 당신에게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우울이 머무르고 있다면

우리는 그 실체를 찾아야 한다.

꽁꽁 숨어서 한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질문하며 단서를 찾고 탐문하여 그 실체에 다가서자.

그 실체를 안다 해도 수사의 종결이지, 사건의 종결은 아니겠으나,

실체를 객관화하는 것만으로도 감정에 압도되지 않을 수 있고,

우리는 충분히 애도할 기회를 얻는다.





그러니 당신의 심연에 묻는다.

당신은 무엇과 이별하였는가.





그 어쩔 수 없었던 모든 것들에게,

애도를 보낸다.





힘이 들 땐

힘이 든다고 말할 것





나는 힘들다는 말을 잘 하지 않는 타입이다.

남에게 힘들다고 말하지 않을뿐더러

스스로도 힘들다고 잘 생각하지 않는다.

말하고 나면 더 힘들 것 같아서 늘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힘이 들어도 힘들지 않은 척 감정을 묶어두면

자신에 대한 감각은 무뎌진다.

그 무뎌진 감각은 다른 감정들도 무디게 만들고,

스스로가 한계점에 부딪치는 것도 모른 채,

착취되는 자신을 방치하게 한다.





그렇기에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상황은 변함없더라도

힘이 들면 힘들다고 투정 부려야 하고

못 버티겠으면 잠깐은 멈춰 설 줄 알아야 한다.

언제나 괜찮다며 마음을 다잡을 수 없고





늘 강한 사람일수도 없다.

그러니 인생에 설치해야 할 액티브x가 너무 많을 때

책임감에 익사할 것 같을 때

집에 돌아온 순간 눈물이 날 때

“나도, 이제는 힘들다”고 말하라.





누구도 당신을 대신 지켜줄 수 없고,

견디기 버거운 희생은 자기 학대일 뿐이다.

조금은 이기적이어도 괜찮고 조금은 무책임해도 된다.

책임감을 논하며

질식할 때까지 스스로를 방치하는 것만큼

자기 자신에게 무책임한 일은 없다.





+

그런 의미로 졸라 힘들었습니다.





불안하다고

무작정 열심히 하지 말 것





생각해보면 나는 대학을 졸업한 뒤

꽤 많은 것을 하며 열심히 살았다.

공모전에서 수상도 했고,

돈을 내고 이상한 단체의 리더십 프로그램에도 참여했고,

서포터즈가 되는 일들도 찾아다녔다.

지나고 보니, 지금 내 일엔 전혀 도움 안 되는 것들을

참 열심히 했다.





물론 세상에 쓸모없는 경험이 어디 있으랴.

스티븐 잡스가 타이포그라피를 배워둔 것이

훗날 애플 디자인에 영향을 끼친 게 아니더냐.

하지만 시간은 무한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전문적인 영역이 있어야

부수적인 경험도 빛을 보는 거다.

우리는 가만히 있으면 도태되는 것 같은 세상에서 산다.

뭐라도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아서 뭐라도 하고

거기에서 안도감을 얻는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쓸 수 없는 어설픈 중국어 실력과

어떤 자격도 증명하지 못하는 허술한 자격증과

뭘 했는지 기억도 안 나는 활동들로는

삶의 무엇도 보장되지 않으며,

그 안도감은 쉽게 증발한다.





세상에는 우리의 불안을 이용해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있고,

뭣이 중헌지를 모르면 현혹되는 법이다.

그러니 단지 열심히 살아가는 자신을 증빙하기 위해

사람들의 무리 안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불안에 쫓겨 열심히 하는 건 그만두시라.

대신 원점으로 돌아가자.





당신의 삶을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그 목적을 세우고 방법을 찾자.

당신의 목적을 충분히 의식하고 실천하는 것.

안도감이란 그곳에 있다.





사람들이 작당해서 나를 욕할 때도 나는 이렇게 생각했어요.

‘네 놈들이 나를 욕한다고 해서 내가 훼손되는 게 아니고,

니들이 나를 칭찬한다고 해서 내가 거룩해지는 것도 아닐 거다.

그러니까 니들 마음대로 해봐라, 니들에 의해서 훼손되거나,

거룩해지는 일 없이 나는 나의 삶을 살겠다.’

_ 김경,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 김훈 인터뷰 중에서





서로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보일 것





실종된 후 사체로 돌아온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가

뉴스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적이 있다.

한동안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그 사건이 자살인가, 타살인가,

본인 과실로 인한 사고사인가를 두고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하지만 자살이든, 타살이든, 본인 과실로 인한 사고사이든

비극이 아닌 것이 무엇일까?

이방인에게는 달동네도 낭만이고.

여행자에겐 빈민촌도 경험이고,

제3자에겐 누군가의 비극도 가십거리가 된다.





그렇게 우리는 때때로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애정 없는 호기심을 멈추지 못한다.

하지만 그게 나의 이야기가 된다면, 우리는 허락할 것인가?

우리에겐 타인의 사생활을 알 권리가 없다.

내 인생이 누군가의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이 싫다면

타인의 삶 역시 보호되어야 한다.

타인의 삶은 지켜주지 않은 채,

나의 삶만 배타적 보호 구역으로 지정할 수 없는 것이고,

나에 대해서는 잊혀질 권리를 주장하며,

타인에 대해서는 알 권리를 주장할 순 없다.





타인의 사생활에 호기심을 접어두는 것.

그건 내 삶을 지킬 수 있는 전제이자

우리가 인간으로서 서로에게 보여줄 수 있는 예의일 것이다.





모든 이에게 이해받으려

애쓰지 않을 것





결혼은? 취업은? 연애는? 저축은?

사람들은 이런 질문이 불편하다고 착각한다.

사실은 질문이 불편한 게 아니다.

그 질문 뒤에, 나에 대해 내리는 타인의 판단이 불편한 거다.





자신들의 방식과 다르다는 이유로

나를 잘못된 사람으로 만드는 시선과 판단.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면서

타인에 대해선 심리학자이자, 프로파일러이자,

가장 중립적 비평가로 둔갑하여

너무나 쉽게 판단한다.





그러나 누군가 이차방정식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문제는 이차방정식이 아닌 그 사람의 이해력 부족에 있듯이

누군가 우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 역시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의 이해력 문제일지 모른다.





그러니 그들에게 쩔쩔 맬 필요도 없고

우리를 증명하려 애쓸 필요도 없다.





우리는 편협한 이들에게

이해 받으려 사는 게 아니다.





+

3인칭 시점을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여기는 오만은

언제나 진실을 오독하기 마련이다.





서로의 경계를 지켜줄 것





늘 밝은 모습의 친한 친구가 있다.

나는 대학 시절 과제 쓰나미에도, 회사의 철야 근무에도

그 친구가 우울해하거나 힘들어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친구의 그런 모습에 다들 신기해했다.

과연 그늘 한 점 없는 인간이란 가능한가?





10년 넘게 본 친구로서 짐작하건대

친구는 너무 어두워서 그늘을 숨긴다기보단,

그늘의 면적이 남들보다 넓지 않은 것 같다.

체력도 좋고, 마음도 건강하고, 예민하지 않다.

다만 친구에겐 넘어서지 않고, 넘어오게 하지 않는

개인의 영역이 있는 듯하다.

그건 비밀이 많다거나 음흉한 사람이라 그런 게 아니다.

누구나 개인의 영역이 있는 것이고,

안정감을 느끼는 경계의 범위가 다를 뿐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우리가 남이야?’라는 (당연히 남인데) 말로

경계를 침범하는 관계에 익숙해졌고,

그 경계를 침범하는 것을 친밀함으로 여기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그늘을 낱낱이 확인하고,

경계를 잃는 것만이 좋은 관계는 아니며,

친구라는 이름으로 경계의 통행권을 요구할 수는 없다.

설사 누군가의 경계가 너무 두텁다 해도,

그걸 타인이 밖에서 깨고 말고 할 것은 아닐뿐더러,

개인의 사적 영역을 완전히 헤집는 관계는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그렇기에 좋은 관계란,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는 것이며,

좋은 우정이란, 친밀감을 느낄 수 있고,

한편으론 안정감이 담보될 수 있는 거리에서

애정으로 함께 하는 것이다.





+

모든 경계를 허물지 않을지라도

그녀는 내게 좋은 친구다.





너그러운

개인주의자가 될 것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한국과 일본에서 베스트 셀러에 올랐다.

단순히 잘 팔리는 정도가 아니라 불황인 출판계에선 신드롬에 가까웠다.

왜 이 책이 한국과 일본에서 베스트 셀러가 될 수 있었을까?

두 나라는 ‘행복 연구’에서 중요성을 나타내는 국가이다.

높은 경제 수준에 비해 행복도가 눈에 띄게 낮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개인주의는 행복감을 느끼는데 중요한 문화적 특성으로

개인주의가 강할수록 소득과는 별개로 사회 구성원의 행복감은 높아진다.

반대로 경제 수준이 높다 해도 개인주의가 충분히 발달하지 못한 국가는

그에 상응하는 행복감이 따라오지 못한다.

초집단주의 사회인 한국과 일본이 이러한 경우다.





그렇다면 집단주의의 어떤 면이 개인의 행복을 가로막는 걸까.

집단주의 사회에선 집단의 목표와 화합을 개인의 자유보다 우선시하며,

집단의 존속을 위해 개인을 통제하기도 한다.

그것만으로도 꽤 지치는 일인데, 더 큰 문제는 통제의 ‘수단’에 있다.





사회가 개인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개인주의 사회가 주로 개인의 ‘죄책감’을 사용한다면,

집단주의 사회는 주로 ‘수치심’을 사용한다.

죄책감이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이라면,

수치심은 타인을 통해 바라본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통제하며, 끊임없이 타인을 의식하도록 요구받는다.

역지사지라는 가르침 속에,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의 행동을 점검하고,

그 결과 “보란 듯이 잘 살겠다”

“남부끄럽지 않게 살고 싶다” 같은 쓸데없는 말을 하는 거다.





이 과도한 타인의식은 마음에 CC TV를 설치하는 일이라서,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우리는 긴장되고 불안하다.

그렇기에 한국과 일본에서 《미움받을 용기》라는 책이

신드롬에 가깝게 팔려나갔다는 건,

그만큼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며 살아간다는 방증이자

집단주의에 살고 있는 우리의 피로도를 보여준 것이다.





우리가 집단주의 사회가 된 이유는

공동 노동이 필요했던 농경 사회의 영향을 받았다는 추론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이젠 다같이 모여서 벼농사를 짓고 살 것도 아니지 않나.

우리에게 미움받을 용기보다 필요한 건 합리적인 개인주의다.

무조건 물 건너 온 서양 것이 좋다는 게 아니라,

지금의 집단주의 문화는 득보다 실이 많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구에 따르면 개인주의는

반사회적 행동에 가까울 거란 통념과는 다르게

친절함과 관대함, 사회적 협동과 연결되어있다.

있는 그대로의 서로를 존중하기에

더욱 따뜻한 관계가 맺어질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겐 두 가지 변화가 필요하다.

하나는 타인의 삶을 지나치게 관심 두고 참견하지 않는 것인데

이건 일종의 감수성을 키우는 문제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타인의 반응에 지나치게 예민해지지 않는 것이다.

각자의 삶의 방식과 가치관을 인정하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자.

나 역시 완벽하지 않지만, 노력하고 있다.





나와 당신이 조금 더 행복하기 위하여

나에게도 타인에게도 혜자스러움을.





일상에서

승패를 나누지 않을 것





대학교 OT 때 동기 여자아이와 대화를 나눴다.

그 아이는 서울에 있는 한 미술고 출신이었는데,

우리 과엔 그 학교 출신이 몇 명 있었다. 그게 신기했던 나는,

“A랑 B랑 동창이라며~ 같이 와서 좋겠다.”

“아니, 별로 안 친했어.”

“응? 왜?”

“다 경쟁자잖아.”

나는 하이틴 드라마 보는 줄.





물론 지금도 그 친구가 오버했다는 생각이야 있지만

그때는 내가 잘 몰랐을 뿐,

우리 삶에 경쟁적 인간관계는 이미 깊숙하게 들어와 있었다.

학창시절에 ‘성적을 올리는 비결’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비결이라는 건 라이벌을 만들어서 그 사람을 떠올리며 공부하라는 것.

그래서 나도 한 친구를 라이벌로 생각하기로 했는데, 얼마 가진 못했다.





어차피 전국에 나보다 공부 잘하는 사람은 수두룩한데

이 한 명을 이기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받아들이지 않아서 다행이라 쳐도,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그 글을 읽고 라이벌을 만들었을까.





우정의 기초와 세상에 대한 신뢰를 다져야 했던 그 시절,

우리는 더 좋은 대학, 더 높은 성적을 위해

경쟁적 대인관계를 독려 받았다.

그건 타인을 신뢰하는 대상이 아닌 경쟁하는 대상으로 바라보게 했고,

우리의 공동체 의식을 말살시키며 사람과 세상에 대한 신뢰를 훼손시켰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초집단주의 사회임에도

OECD의 ‘공동체 지수’도, ‘사회적 관계’도 모두 꼴찌를 차지했다.





개인주의가 뿌리내린 서구사회보다도 공동체가 훨씬 빈약하다는 것이다.

그 의미는 여전히 강력하게 남아있는 집단주의 문화 속에서

타인의 시선에 맞춰 행동하지만,

그 시선에 어떤 신뢰나 유대는 없다는 뜻이다.

관계 속에서 질식할 것 같으면서도 고독한 낱개의 개인들만 남은 것.

그 사실이 우리를 힘겹게 한다.





그럼 이렇게까지 하며 우리가 얻은 것은 무엇일까?

경쟁적 인간관계는 파워풀한 경쟁력을 가지게 했을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소설가 한강이 줄리언 반스나 하루키를 경쟁자로 여기고

이를 갈며, 《채식주의자》를 써서 맨부커 상을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관계에서 한 톨이라도 손해를 참을 수 없게 되었다면,

사촌이 부동산을 알아보는 순간부터 아랫배가 아프기 시작했다면,

쉴 새 없이 승패를 나누고 있다면,

나도 모르게 경쟁적인 인간관계에 익숙해졌는지 모른다.

하지만 경쟁심은 우리를 녹초로 만들고 긴장하게 할 뿐

경쟁심이 경쟁력을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나 아닌 모두를 경쟁자로 여기며 자신을 달달 볶을 시간에

진짜 나의 일과 나의 세계를 만들자.





타인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고

서로의 순위를 매기지 않는 공동체를 찾자.





그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자신의 세계를 다질 때

당신이 가진 힘과 가능성은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미움받지 않기 위해

좋은 사람이 되지는 말 것





어렸을 때, 뒤에서는 욕하면서 앞에서는 웃는 사람들을

가식적이라 여겼던 나는 뒤에서도 욕하고 앞에서도 욕했다

(잘했다는 건 아니다).

그 덕분에 나는 적이 많았다.





그런데 만날 일조차 없는 사람이라 해도,

누군가 나를 싫어할 수 있다는 사실이 유쾌하진 않았다.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한다는 말을 들어도,

내가 더 이상 악의가 없으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다르게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라

하고 싶은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나는 왜 좋은 사람이어야 하는가?

물론 나는 여전히 좋은 사람이고 싶다.

나 자신에게, 내 소중한 사람들에게,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하지만 자기가 뭐라도 된 듯이 나를 함부로 평가하는 이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 애쓰는 건

자신에 대한 정당방위 기능마저 상실한 것뿐이다.

나는 대등한 존재일 뿐 약자가 아니며

누군가 나를 싫어한다 해도,

그 사실이 나의 삶을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나는 더 이상 미움받지 않기 위해 좋은 사람이 되려

애쓰지 않을 것이다.





타인에게 상처주지 않는 것은 중요한 미덕이지만

스스로를 지켜내는 건 스스로에 대한 책임이자 권리이다.





+

To my enemies.

I will destroy you.





나를 또라이로 생각하니?

그래. 알면 조심해.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일에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





엄마는 어릴 때 심한 열병을 앓은 뒤 구안와사 후유증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나는 단 한 번도 엄마 얼굴이 이상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엄마와 함께 소풍을 갔는데

같은 반 여자애가 우리 엄마가 이상하다고 말했다.

어린 시절의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유치원에서 수영장에 놀러 가면

나 혼자만 몰래 숨어서 수영복을 갈아입었을 만큼

유난히 부끄러움이 많던 아이였다.

그러나 나는 엄마의 얼굴이 이상하다는 친구의 말을 듣고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엄마의 얼굴에 열병 후유증이 남은 것을

어떤 부분에서, 왜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친구 지인이 산후 조리원에 갔는데

어떤 사람이 남편 직업은 무엇인지, 집은 아파트인지, 주택인지,





자가인지, 전세인지까지 물어본 후에

몇 명하고만 연락처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철없는 초등학생도 아닌데 그런 사람들이 있다.

무례하고, 천박하며, 자기 기준에 따라 사람을 선별하는 이들.

문제는 그 이야기를 들은 친구가 산후 조리원에 가게 되었을 때,

왠지 사람들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악순환.

꼴불견인 건 그들인데, 평범한 이들이 주눅 들어

사람들을 경계하느라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어버린다.





하지만 우리는 무엇에 부끄러워해야 하는가?

정말 부끄러워해야 하는 건 누구인가?





함부로 떠드는 그들이 자신의 편협함을 혹은 무례함을 혹은 속물됨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내가 부끄러울 이유는 없다.

“그 입 좀 닥치세요”라고 까지는 말 못하더라도

우리, 부끄러워할 필요 없는 일에

부끄러워하지는 말자.





+

타인을 함부로 우습게 여기는 이들이

가장 우스운 존재다.





모든 사람과 잘 지내려

욕심내지 말 것





이웃 할머니가 친구네 집에 놀러 와

다음에도 가끔 집에 놀러 와도 되냐고 물었다.

거절을 잘 못하는 착한 친구는 그래도 된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다음에는 수상한 종교를 설파하는 손녀가

그 다음에는 손녀와 친구들이 불쑥 찾아왔다.





어딜 가나 친절한 사람을 난처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때때로 친절에 브레이크를 걸어야 한다.

상대가 불편해할지라도 때론 나의 요구를 이야기해야 하고,

거절을 해야 하며, 단호하고 깐깐하게 굴기도 해야 한다.

물론 그게 쉬운 일은 아니라서 나 역시도 종종 고민을 한다.

상대에게 내가 계속 좋은 사람으로 남아도 될 것인가?

나의 불편함의 크기는 용인할 수 있는 정도인가?





좋은 사람으로 남았을 때 자신이 감당해야 할 불편함과 손해가 크다면

기꺼이 깐깐한 사람이 되는 편이 낫다.

계산적인 사람이 되는 것과

자신의 정당한 몫을 지키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게다가 내가 애써 지킬 만큼 상대가 좋은 사람이라면

나의 요구와 거절을 이해해줄 것이고

나의 요구와 거절에 쉽게 빈정이 상하는 사람이라면

나도 그 관계를 지키려고 애써서 노력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타인의 몫을 넘보지는 않아야겠지만,

자신의 몫은 지켜야 한다.





그렇기에 모든 사람과 잘 지낼 수는 없다.

미안하지만 우리의 1순위는

언제나 우리 자신이다.





생활 기스와 완전 파손을

분류할 것





새 핸드폰을 샀을 때

흠집이 나면 마음이 철렁 내려앉는다.

기능에 문제는 없지만 실수로 생겨난 약간의 흠집들.

생활 기스는 아무리 잘 관리해도 피할 수 없기에

마음을 졸이고 우울해 하는 것보단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는 편이 낫다.

생활 기스를 완전 파손으로 분류하고

새로 구매한다면 남아나는 살림이 없을 테니까.





여기서 생활 기스는 모든 형태의 관계에도 적용된다.

아무리 좋았던 관계라 해도 흠집이 생길 때가 있고

문제 한 톨, 서운함 한 점 없기란 어려운 일이다.

물론 손상이 크다면 새로운 관계를 찾는 편이 낫다.

하지만 살다 보면 생길 수도 있는 생활 기스 때문에

마음속으로 탈락을 외친다면 남아나는 관계 또한 없을 것이다.

관계 결벽증의 결말은 외로움일 뿐

결국 자기 혼자 손해이다.





그렇기에 관계에 흠집이 갔다면 잘 살펴야 한다.

이 흠집은 우정 혹은 사랑이

더는 제 기능을 할 수 없도록 하는 완전 파손인지

아니면 관계의 밀도를 생각하며

너그러움을 발휘해야 하는 생활 기스인지 말이다.





+

Best friend만을 기대하며

Good friend의 가치를 잊지 말 것.





지금의 관계에

최선을 다할 것





10대에서 20대로, 그리고 다시 30대로 넘어오며

나의 친구 리스트는 몇 차례 개편이 있었다.

한결같이 높은 랭킹을 차지하는 친구도 있고

이제는 멀어져 연락처조차 사라진 친구도 있으며

새롭게 인연을 맺어 많은 부분을 공유하게 된 친구도 있다.

지나온 관계들을 곱씹어 생각하면

언제까지 장수할 것 같던 우정이 조기 종영을 맞이했을 때

그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감과 함께 불안함이 든다.

과거의 나는 왜 더 성숙하지 못했을까?

지금의 나는 과연 얼마나 달라졌을까?





하지만 생각해보면 상대방에게도 한계가 있었듯이,

나에게도 한계가 있었을 뿐이고,

살며 맺은 모든 관계를 누적시키며 살 수는 없기에

연약한 관계는 마모되어 사라졌을 뿐이다.





우리가 특별히 잘못된 사람이 아니라

알고 보면 우정의 종료는 누구의 삶에나 일어나는 보편적인 일이다.

그러니 떠나간 관계에 대해 스스로를 지나치게 탓하지도,

남겨진 것에 겁먹지도 말자.

대신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주자.

지금의 나와 닮은 새로운 친구를 만나자.





당신이 누군가가 필요하듯이

누군가도 당신을 필요로 하며

완벽하지 않은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기대며 살아간다.





그린라이트가

켜졌다면 직진할 것





우리는 종종 마음에 두고 있는 상대의 심중을 해석해

그린라이트 여부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상대에게 연락하지 않는다]라는 한 가지 행동조차





1. 손가락이 부러졌다.

2. 아웃 오브 안중이다.

3. 중요한 일을 앞두고 매우 바쁘다.

4. 먼저 연락이 오길 기다리고 있다.





등의 성향이나 상황에 따라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한 가지 경우로 판단하기엔

언제나 사람 바이 사람,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 거다.

그렇기에 어떤 연애 고수의 조언도,

타로 카드 아줌마의 호언장담도,

상대의 진심을 해석할 순 없다.





그럼에도 그 사람의 그린라이트 여부를 알고 싶다면?

가장 적절한 질문은

“그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아니라

“나는 그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이다.





그 질문의 대답으로

“나는 그 사람이 좋다”라는 결론에 도달한다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

전진해야 할 [진짜] 그린라이트가 될 것이다





+

사랑도 되면 한다 쯤의 생각으로

안전 거리 확보에만 열을 올린다면

겁쟁이에게 사랑은 너무 과분하다.





그럼에도

누군가와 함께할 것





한때 고독력을 주제로 한 책들이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사람들은 왜 그런 책을 읽을까?

서은국 박사의 책 《행복의 기원》에서는

사람의 DNA가 생존을 위한 지침서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책 내용이 인상적이라 설명하자면,

DNA에는 우리 조상들의 생존에 대한 매뉴얼이 담겨있다.

생존에 좋지 않은 행동을 하면 그 행동이 억제되도록

스트레스 시스템이 작동하고(스트레스의 원리),

생존에 좋은 행동을 하면 그 행동을 계속 하도록

도파민이 팡팡 분비된다(행복의 원리).

그러니까 잠을 못 자면 스트레스를 받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행복한 건 생존을 위한 DNA 전략인 것이다.





그럼 우리 조상들에게 생존과 직결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그건 음식과 인간관계다.

시조새 파킹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무리 생활을 하던 조상들에겐 무리에서 이탈하는 건,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렇기에 인간관계에 금이 갈 때 느끼는 압박감과 스트레스는

본질적으론 생존에 대한 위협 신호다.





음식에 대한 불안이 크지 않은 현대인에게

인간관계는 가장 큰 스트레스 요소로 남았고,

강력한 위협 신호로 진이 빠진 사람들에게

혼자의 유용성과 기쁨을 설파하는 책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사실 그 책들의 이야기가 맞다.

이제는 누가 나를 미워하거나 말거나

세상이 <워킹데드>의 세트장으로 변하지 않는 한

배고픈 순간에는 체크카드가 있고,

위험한 순간에는 경찰이 있으며,

만약의 순간에는 보험사가 있다.

신세계가 펼쳐진 거다.

그러니까 이젠 고독해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다. (만세)

긴장 좀 풀고, 좀 미움 받아도 안 죽는다.





다만 이 기쁜 소식 가운데 한 가지 문제는

이 신세계에 맞춰 우리의 DNA가 업데이트되지 않았다는 것.

사람에게 인간관계는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기에

인간관계의 금이 갈 때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 만큼,

좋은 인간관계를 맺을 때 가장 큰 기쁨을 누린다.





이 신세계에 시대착오적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누군가와 함께할 때 가장 행복하다.

이건 문학이 아닌 진화 심리학의 영역이며

감성이 아닌 본능적으로 그러하다.





그러니 혼자서도 행복할 수 있다며 어려운 길로 돌아가지 말고,

많은 사람 중 나와 주파수가 같은 누군가를 발견하라.

상한 음식을 먹고 탈이 났다 해서 식음을 전폐할 필요가 없듯이,

또라이를 만나 힘들었다 해서 모든 관계를 끊어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건 상한 음식을 골라내는 후각이고,

진심 없는 인간들은 곁에 두지 않는 안목일 뿐.





당신에게 어떤 상황이 오든,

당신을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는 우정을 찾아라.

나의 부족함을 비웃지 않을 거라는 믿음.

그런 믿음이 가는 누군가에게, 믿음이 가는 누군가가 되어주는 것.

그것이 가장 좋은 안정제이자

행복이란 추상적인 단어의 유일한 실체일 것이다.





+

약속 시간에 늦은 그에게 필요한 건

변명이 아닌 사과이고,

짝사랑 중인 그녀에게 필요한 건

타로 상담이 아닌 용기이며,

외로운 그에게 필요한 건

고독을 견디는 힘이 아닌 진실한 누군가이다.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가장 저질스러운 인간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다.

_플라톤





때론 재미없는

이야기를 할 것





어느 방송에서 흙수저, 금수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당시 워낙 이슈였던 터라 어딜 가나 그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때다.

그중 한 패널이 우리가 식당에 들어갈 때

숟가락을 보고 식당을 고르는 게 아니듯

숟가락이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떠먹는 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니 숟가락에 연연하지 말고 자신이 원하는 걸 떠먹으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멋진 비유이자 위로였고, 선한 마음으로 이야기한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흙수저, 금수저에 대한 이야기는

진짜 숟가락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본질은 세습 자본주의에 있다.

산업 기반이 새롭게 확장되어 쉽게 기회를 얻을 수 있던 과거에는

비교적 계층 간의 이동이 자유로웠다.

그러나 지금은 계층 이동의 역동성이 사라지고 있다.

부모의 부나 사회적 지위에 따라 차별적으로 주어진 기회는

소득과 직업의 격차로 이어지며

자본이 세습되는 과정에서 계층은 고착되고 있다.

그러니까 흙수저, 금수저는 고착화되는 사회 계급의 문제이기에

해결책을 논하려면 세상 진지하더라도

자본의 세습과 기회의 불평등을

어떻게 완화해갈 것인지 묻고 답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동안 몇 권의 책을 내며 개인적인 위로와 격려를 보냈다.

그런데 지극히 개인적인 위로들이

우리가 맞닿은 문제의 표면만을 표류하며

사회적 담론에 닿는 것을 흐리게 한 것은 아니었을까.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고 위로만 받으려 하는 집단 퇴행 속에선

누구도 돌부리를 치우려 하지 않고 그저 방관할 뿐이다.

위트 있는 비유로 가볍게, 혹은 냉소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편할 수 있다.

나 역시 이왕이면 덜 심각한 편이 좋다.

하지만 때론 어렵고, 복잡하며, 재미없는 이야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들을 준비를 해야 한다.





스스로를

비난하지 말 것





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방청객을 인터뷰하는데

청소년인 아들이 엄마에게

“엄마, 내가 나중에 벤츠 사줄게”라는 말을 했다.

그 말에 엄마는 아들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물론 기특한 마음이다.

그런데 나는 좀 이상한 사람인지 어딘가 씁쓸했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그 아이는 엄마에게

벤츠를 사주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 아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정말 특수한 경우가 아닌 이상 그렇다는 거다.





탯줄을 끊는 순간 돈줄이 연결된다는 말처럼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는 자식에게 많은 양육비를 쓴다.

치열한 경쟁을 뚫기 위해 높은 교육비도 부담한다.

대학에 가면 수천만 원의 등록금을 내야 하고,

자취라도 했다간 집세와 생활비로 매달 몇 십만 원씩 부담해야 한다.





그러니까 자식들은 사회에 발을 내딛기 전까지

부모에게 엄청난 빚을 지는 것이다.

그래서 커서 벤츠를 사주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부모님의 등골 브레이커가 됐으니

벤츠 정도는 사줘야 이 빚을 갚을 수 있을 것 같아서.





문제는 빚을 갚는 게 쉽지 않은 데 있다.

취업이 어렵다. 사회 진출이 자꾸 유예된다.

5%만이 대기업, 공사 등 안정적인 직장을 잡고(그래도 벤츠는 못 사드린다),

대다수의 경우 취업을 해도 월급은 빠듯하다.

그 월급을 가지고 결혼이라도 해서 신혼집을 장만할라치면,

은행에 빚을 지거나, 부모에게 또 다시 손을 벌려야 한다.





그 후 자식을 낳으면 나의 부모가 그랬듯

높은 교육비와 양육비를 지불해야 하니

이 사이클로는 부모님께 벤츠를 사줄 날은 오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존재한다는 이유로, 평범한 삶을 산다는 이유로,

얼마나 많은 경제적, 정서적 빚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가.

진짜 문제는 높은 양육비와 교육비, 등록금, 주거비

그리고 이를 감당할 질 좋은 일자리의 부족이지

우리들의 잘못이 아니다.

사회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빚을 잔뜩 안기는 사회,

그리고 그 빚을 갚을 방법은 내놓지 않는 사회에서

개인은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며 죄책감과 부채감에 시달린다.





만약 당신도 죄책감과 부채감에 시달려야 했다면

적어도 왜 빚쟁이가 됐는지는 알아야 한다.

그 사실이 빚을 탕감해주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스스로를 비난해서는 안 된다.

우리를 빚쟁이로 만드는 사회가 병든 사회일 뿐.





우리가 잘못 산 게 아니다.





나의 몫을

외면하지 않을 것





“요즘 재미있는 일이 하나도 없어.

예전엔 이것저것 흥미가 많았었던 것 같은데 나 뭐가 문제일까?”

고민하고 있는 친구에게 해줄 수 있는 적당한 조언은 무엇일까?





1. 취미를 가져봐.

2. 동호회에 나가봐.

3. 여행을 가봐.

4. 정신 상담을 받아봐.





이런 조언도 가능하겠지만

문득 친구의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당시에 친구는 야근은 물론 주말 근무가 일상이었다.

거기다 회사 운영의 어려움 때문에 정규직에서

갑자기 비정규직으로 전환되었고,

앞으로의 상황도 불투명했다.





그러니까 친구가 어떤 것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장시간의 노동과 고용 불안 때문인 거다.

몸도 마음도 지치고 불안했던 친구가,

약간의 짬이 난 시간에 어떤 생산적이고 즐거운 일을 할 수 있는가?

그렇기에 어떤 위로도 부적절했다.





근로 환경의 개선 그리고 삶의 최소한의 안정성 없이

실존의 문제는 위로로 덮이지 않는다.





우리에겐 위로가 아닌 무엇이 필요할까?





2004년도에 주 5일제가 시행되기 전까진

대다수가 토요일에도 출근을 했다.

그런 우리에게 불금이 생긴 건 개인의 치열한 노오력도

개인의 강한 의지도 아닌 사회 시스템의 변화였다.





그런데 우리는 여전히 개인의 삶만을 돌보며 살아간다.

나 하나라도 잘 살아보겠다는 마음으로 잠을 7시간에서 6시간으로 줄이고

스펙 3종 세트를 스펙 5종 세트로 채운다.

그러나 결국 분투하는 또 다른 개인은 잠을 6시간에서 5시간으로 줄이고

스펙 5종 세트를 스펙 7종 세트로 채울 뿐이다.

개인이 불행한 이유가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면,

개인의 불행은 자기착취적 노력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것이 곧 사회 문제임을 직시해야 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물론 모두가 광장에서 바리게이트를 치고 화염병을 던지는 것이

해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흑백론에 사로잡혀 개인의 노력을 경시하라는 뜻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몫이 있다.

골목상권 붕괴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대형 마트가 아닌 재래시장이나 골목 상점에서 물건을 살 수 있고

노동자 문제를 해결 할 수는 없지만

파업에 나선 사람들을 응원할 수 있고





기울어진 언론의 균형추를 바로잡을 수는 없지만

대안 언론에게 후원할 수 있고

부패한 정치가 하루 아침에 달라질 리 없겠지만

그래도 진정성이 느껴지는 이에게 투표할 수 있으며

속물들의 세상을 뒤엎을 수는 없겠지만

보통의 존재인 서로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다.

일상을 벗어나지 않은 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많다.





바닷물이 썩지 않는 이유가 3%의 소금 때문이듯,

만약 세상이 어딘가 잘못되어있다면

우리 각자의 3% 노력이 부족해서 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각자의 몫을 하자.





우리 사회의 유일한 구원자는 외면하지 않는 개인이다.





+

우리 시행착오 속에서 배우고 성장하고 있다.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말자.

우리에게는 성숙한 시민이라는 최후의 보루가 있다.





필요하다면

버틸 것





첫 회사에서 만나 지금까지 친하게 지내는 동기는

일 잘하고 성실하고 친절하다.

단, 상사나 사장이 자신을 소모품 대우하는 건 견디지 못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당히 참으면서 일하지만, 그녀는 사직서를 들이민다.

물론 그녀가 일을 잘하기에 회사는 잡는다.





한번은 사장이 온갖 생색을 내며 성과급 20만 원을 주고는

막상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안 들자

“다시 뺏어버린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내가 듣기에도 그 사장은 진상이었다. 이게 누굴 빙다리 핫바지로 보나.

하지만 나는 친구에게 아무리 그래도 사직서를 내지 말라고 했다.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는 나는 어떤 사람인가.





회사를 다닐 때, 상사가 나에게

채용 공고에 지원한 실제 지원자 숫자를 2배는 부풀리며

“디자이너 지원자 엄청 왔어~ 긴장해”라고 말했다.

네 자리는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으니 알아서 하라는 말.

나는 “그럼 제가 나가드릴 테니, 새로 뽑으세요”라고 말했다.

물론 지금보다 어리고, 나를 자를 수 없을 만큼

일을 했기에 가능한 말이었지만, 실상은 나도 그녀와 비슷한 타입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에게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했다.

그녀는 그녀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 그만둬야 한다.

밥그릇을 놓고 협박하고, 열심히 일하는 것 외에

비굴함까지 강요하는 상사가 아무리 졸렬하다 해도

겨우 그런 인간들 때문에 삶의 방향을 수정할 필요는 없다.

그 이유로 그만둔다면 그건 자신의 삶에서

그 사람의 영향력을 높이는 일이다. 그럴 만큼 그 사람은 대단한 존재인가.





물론, 그들을 용서할 필요도 없고 웃어 보일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당신에게 그곳이 필요하다면 버티자.

돈 때문에 일하는 건, 비굴한 게 아니라 당연한 것이며

버티는 건 부끄러운 것도 비참한 것도 아니다.

다만, 그런 인간들보다 자신의 삶이 소중한 것뿐이다.





조바심은 버릴 것





아주대 사회학과의 노명우 교수는

사회는 엄청난 속도로 변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정말 [천천히] 변화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건 고도 비만인 여자가 3개월 동안 지옥의 다이어트로

표준 몸무게가 되었다 해도 꾸준히 관리하지 않으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원리다.





다이어트도, 개인의 삶의 문제도, 사회 문제도

한 순간에 일어나는 혁명은 없고 변화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요요 현상을 막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 지속적인 관리이듯

때론 뒷걸음에, 때론 제자리 걸음에 답답하고 조바심이 날지라도

변화를 위해선 지속적인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모든 일이 그랬다.





변화를 위해 가장 필요한 자질은 지치지 않는 것이다.





잘 싸우는 법을

배울 것





나는 친언니와 사이가 좋은 편인데,

그럼에도 가끔은 사소한 일로 다툴 때가 있다.

함께 살았던 20여 년의 세월에서 우리는

서로의 감정을 설명하고 화해하는 법을 채득했다.

하지만 싸움 자체가 싫다는 부모님은 종종 중재자로 나서서

갈등을 억지로 봉쇄하려 했고 나는 그것이 답답했다.

억압에 따른 침묵일지라도

처리되지 않은 감정의 응어리가 쌓인다 해도

겉보기에 조용한 것이 부모님 세대가 말하는 평화였다.





우리 사회는 의견 충돌을 싸움질이라 여기며 질색하고

복종과 순응을 요구했다.

그래서 모난 돌은 정 맞지 않기 위해 무뎌져야 했고,

중간이라도 가기 위해선 가만히 있어야 했고,

며느리는 3년 동안 청각, 언어, 시각 장애인이 되기를 강요받았다.

그 결과, 화병은 우리 사회에서만 존재한다는 ‘한국병’이 되었다.

감정을 억압한 가짜 화합 속에서 개인은 병들고 관계는 곪아간 것이다.





그런데 파업도 쟁의도 토론도 없는 사회,

단일한 가치를 다같이 추구하는 사회가 이상적이라면

북한만큼 이상적이고 완벽한 사회는 없지 않은가?

억압이 정신병을 유발한다는 프로이트의 말처럼,

억압으로 화합된 사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다.

문제는 싸움이 아니라 제대로 싸우지 못해

문제의 해결책과 제대로 된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데 있다.





얼마 전, 관광버스 기사가 졸음 운전을 해서 사고를 낸 적이 있다.

그 사고로 4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벌어졌고

많은 사람들은 버스 기사를 비난했다.

일부는 그가 악마 같은 존재라고 이야기 했다.





그는 정말 악마 같은 존재일까?

관광버스 기사들은 200만 원 남짓의 한달 수입을 벌기 위해

하루 평균 16시간을 운전하고, 3~4시간의 수면을 취하며

숙식이 제공되지 않아 버스 트렁크에서 잠을 자기도 한다.

실제로 그 기사는 전날에도 버스에서 잠을 잤다.

그렇게 제대로 된 수면을 취할 수 없는

가혹한 근무 여건을 견뎌온 이들이 졸음 운전을 하게 된 것에 대하여,

어떻게 개인에게만 책임을 묻겠는가?





안전에 대한 비용은 지불하려 하지 않는 사회에서

우리는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두려워하듯이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두려워해야 한다.

핵심은 사회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감과 도덕성에 의존하는

사회 시스템의 후진성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시스템에 대한 논의에는 닿지 못한 채

개인을 비난하는 것에 머무르거나

싸움의 당위가 아닌 진보, 보수를 나누는

독선적인 편가르기로 담론을 뒤바꾸곤 한다.

그런 논쟁으론 문제의 본질에 다가서지 못하는 데 말이다.





만약 내가 사는 이곳이 좀 더 나은 곳으로 변화하기를 원한다면

단순히 어깃장을 놓는 독선과

싸움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에서 벗어나

해결책을 찾기 위한 싸움의 방법을 채득해야 한다.





비난이 아닌 대안이 필요하며,

모욕이 아닌 설득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의 문제는

맨날 싸워서가 아니라,

제대로 싸우지 못함에 있다.





희망의 근거를

만들 것





요즘은 희망이라는 이야기를 입에 담기가 낯뜨겁다.

희망이라는 말 뒤에 고문이라는 말이 따라다닌다.

그렇다면 정말 희망은 고문일까?





이런 예시는 좀 촌스럽다고 여기지만 답이 될 것 같아 이야기하자면,

베트남 전쟁 때 많은 미군이 포로로 붙잡힌 일이 있었다.

많은 군인들은 오랜 수용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갔는데,

당시 장군이었던 스톡데일의 증언에 따르면

가장 먼저 죽은 이들은 낙관론자였다고 한다.

그들은 크리스마스 전에는 나갈 수 있을 거라고 믿다가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부활절에는,

또 부활절이 지나면 추수감사절에는 나갈 거라 믿다가,

다시 크리스마스를 맞자, 반복되는 상실감에 죽게 되었다고 한다.

그럼 그들을 죽게 한 것은 희망이었을까?

나는 동의하지 않는데,





이들은 희망이 아닌 근거 없는 낙관을 품었던 것이고,

그건 사실 현실 회피에 가까웠다.

한때 우리 사회는 낙관론자로 넘쳐났다.

경제는 곧 호황으로 돌아설 것이라 예측했고,

자기계발서를 통해 성공의 비밀을 알게 되었으니

성공은 손에 닿을 듯 가까이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얼음장 같았다.

노력은 반드시 결실을 맺을 거라는 어린 시절의 진리는

노력은 때때로 결실을 맺는다는 부분적 진실로 다시 정의되었고,

부풀었던 기대는 상실감으로 되돌아왔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비관론자가 되는 편이 나을까?

그것 역시 해답은 아닐 것이다.

낙관주의자 다음으로 죽은 것이 비관론자였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생존자였던 스톡데일은 현실을 직시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훌륭한 대우를 받는 포로’의 사례로

비디오테이프에 찍히는 걸 피하기 위해

의자로 자신을 내리치고 고의로 자해를 하기도 했고,

부하들의 고립감을 줄이기 위해 자기들끼리만 소통할 수 있는

내부 통신 체계를 만들기도 했다.

그 결과, 멘탈 갑이었던 그는 7년 반의 포로 생활을 견디고

생존할 수 있었다.

요즘은 희망을 논하는 것이 고문이 되었다.

맞다. 현실감을 잃은 희망은 아편에 불과하다.

그렇지만 희망이 없다면 삶을 견딜 수 있을까.

언제나 최후의 진실은 현실의 기반 위에 희망을 품어야 한다는 것.





하루 네 끼를 먹으며 살이 빠지길 바랄 수는 없는 것처럼

희망을 품고 싶다면 방법을 찾아라.

그리고 방법에 대한 충분한 검토가 있었다면 그 고단함을 견뎌내라.





당신이 해야 할 일은

막연한 희망이나 대안 없는 절망이 아니라

희망의 근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기꺼이 세상에

호의를 베풀 것





나는 모르는 사람을 잘 도와주는 편이다.

장례식장을 찾아가는 노부부에게 내릴 역과 갈아탈 버스,

장례식장 전화번호까지 찾아 적어주기도 하고,

어떤 여자의 뒤를 쫓는 수상한 사람들을 보고

여자를 불러 세워서 다른 길로 가게 하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 ‘오지라퍼’가 된 것은 배낭 여행에서의 기억이 컸다.

핸드폰도 망가지고, 서툰 언어와 낯선 환경 속에서

내가 여행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크고 작은 도움 덕분이었다.

한국에서 나는 약자가 아니다.

길도 잘 알고, 건강하고,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한다.





그래서 알지 못했을 뿐,

내가 약자가 된 순간 작은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했고,

그때마다 기꺼이 도움을 주는 누군가가 있었다.





괜히 모르는 사람을 도와주다 피해를 볼 수도 있다고 걱정하는 엄마에게

엄마가 더 나이가 들면, 그땐 나 같은 사람들이 엄마를 도와줄 거라 말했다.

도움이 필요한 순간 누구에게도 도움을 받지 못하면

점점 마음을 닫게 되고 더는 타인에게 손을 내밀지 않게 된다.

나는 어떤 피해도 주지 않는 대신 어떤 도움도 주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는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않다.





내가 삶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건 조심성과 신중함이지, 불신이 아니다.

나는 여전히 다수의 선의를 믿는다.





다른 누군가에게

세상이 선의를 베풀 만한 곳이라는 확신을 주고 싶고,

내가 어려운 순간,

누군가가 손 내밀어 줄 것이라는 믿음 속에서 살고 싶다.





돈으로 환원되지 않는

나 자신이 될 것





에피쿠로스는 인간의 행복에 필요한 3가지 요건을

우정, 사색, 자유라고 했다.

자유, 그러니까 내 의지대로 살아가는 것.

어릴 때는 당연하고 쉽게만 느꼈던 단어지만

나이가 먹을수록 절감하는 건

자유의 일정 부분은 돈을 통해 실현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공과금을 내기 위해, 친구 결혼식 축의금을 내기 위해,

먹고 살기 위해, 매일 아침 일어나 돈을 벌며

우리의 자유를 지불한다.

반대로 이야기 하면,

자유를 잃지 않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우리는 사회적 입지를 다지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가능성을 증명해내며 그에 따른 보상을 요구해야 한다.

돈은 생존의 수단이기에 결코 간과될 수 없다.





하지만 돈의 중요성이 아무리 크다 해도,

돈을 생활수단의 가치를 넘어, 사람의 척도로 삼아서는 안 된다.

돈으로 사람의 높낮이를 측정할 수 없으며,

삶의 성패를 결정할 수도 없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삶의 기준과 철학을 세우며

돈과 명함으로 환원되지 않는 진짜 자기 자신을 만나야 한다.





‘어떻게 돈을 벌 것인가’ 하는 질문 이전에,

‘무엇이 옳은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무엇을 소유했는가로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되자.

진짜 섹시함은 내면에서 나오는 당당함에 있을 것이다.





+

갑질 횡포로 전 국민의 공분을 산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과연 행복할까?

글쎄, 내가 아는 한 행복한 사람은

그렇게 정신병자처럼 굴지 않는다.





헝거게임에

참여하지 않을 것





얼마 전 할리우드 남자 배우와 유모의 불륜 스캔들이 기사로 뜨자

누리꾼의 반응은 사실이 아닐 거란 쪽으로 모아졌다.

그 이유는 남자 배우에 대한 신뢰 때문이 아니라

왜 저런 사람이 고작 유모와 바람이 나겠느냐는 것이었다.

우리는 평등을 외치고, 갑질과 차별에 분개한다.

그러나 실상은 자신이 무시받고 싶지 않다는 뜻이지

내가 다른 이를 무시하지 않겠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구분 짓고 있는 것일까.

언젠가 사회 뉴스를 읽다가 그 밑에 달린 댓글을 보았다.

내용은 높은 청년 실업률의 해결책으로

지방대부터 아웃시켜야 한다는 것.

나는 이런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것에 놀랐으나,

더 놀란 건 그 의견이 많은 이의 공감을 받은 베스트 댓글이 된 것이다.





순간, 영화 <헝거게임>이 떠올랐다.

<헝거게임>은 판엠이라는 가상 세계에서 벌어지는 SF 영화이다.

헝거게임이란 12개 구역에서 각각 조공인 1명을 뽑아서

최후 승자가 나올 때까지 서로를 죽여야 하는 게임이다.

지배층인 캐피톨은 조공인들에게 공포심을 심고자

헝거게임을 개최하고 이를 방송으로 내보낸다.





1명의 승자에게 부와 명예를 주는 것으로

11명의 죽음이 정당화되는 게임.

게임이 시작되면 힘이 있는 무리는 서로 연합을 해서,

힘없고 약한 이부터 제거한다.

그렇게 연합해서 약한 이들을 밀어내면

한동안 안전을 보장받는다.

그러나 이 게임은 최후의 1명만을 남기므로

내가 나보다 약한 이를 밀어냈듯, 나보다 강한 이가 나를 밀어낸다.

이 영화는 승자독식경쟁과 신자유주의에 대한 은유라 할 수 있다.





영화에서처럼, 생존경쟁에 내몰리는 이들은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밀어내며 잠깐의 안도감을 얻는다.

하지만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이를 내모는

이 불합리한 게임을 멈추지 않는 한,

어느 누구도 안전할 수 없다.





누군가는 정치의 변화만으로 세상이 나아질 거라고 말한다.

물론 좋은 정치인과 사회의 투명성, 공정성 회복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게임의 룰에 대한 성찰과

서로를 내몰지 않는 연대가 동반되어야 한다.





우리의 안전은 서로를 밀어낼 때가 아니라

서로의 울타리가 되어줄 때 얻어진다.

그러니 은근한 차별과 밀어내기 경쟁을 중단하자.





이 잔인한 게임을 멈추지 않는 한,

다음 차례는 나 자신이 될 것이다.





방황하는 어른이 될 것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는 닐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엄격한 아버지에게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강요를 받으며 자라온 닐은

우연히 세익스피어의 연극 <한 여름밤의 꿈>의 주연을 맡는다.

자신의 자질과 능력을 발휘하며

어느 때보다 행복한 날을 보내고 있는 닐에게

아버지는 당장 그만둘 것을 명령하며, 전학을 시키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연극을 하고 싶었던 닐은 아버지의 강요에 반항하려 하지만

닐의 시선에 어머니의 모습이 들어오자 반항을 포기하고 입을 닫는다.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 절박하고 애처로웠던 것이다.

닐의 표정에는 무력감과 절망감이 비친다.

그리고 그날 밤 닐은 아버지의 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주어진 삶은 견딜 수 없고, 자신이 원하는 삶은 도저히 살 수 없을 때

사람은 절망하는 것이다.





김현철 정신과 의사는 헝가리, 일본, 우리나라의 공통점으로

‘방황이 허락되지 않은 사회’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 세 나라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더 있는데

바로 높은 자살율이다.





우리나라에서 방황은 인생을 망치는 지름길이자 금기에 가깝다.

오죽하면 방황 청소년이라는 말까지 있을까.

대학진학, 취업, 결혼, 출산, 내 집 마련 등 일련의 과정을

[적령기]라는 데드라인에 맞춰 완수해야 하고,

이를 위해선 잠깐의 방황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지 못했다간, 실망하는 부모님과 실패자로 규정짓는 수군거림과

사회적 고립에 대한 두려움을 피하기 어렵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자살률 최고, 출산율 최저라는

두 가지 지표를 갖게 되었다.

이 지표의 공통점은 생존과 번식이라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마저 포기한다는 것.

그만큼 우리가 이곳을 살만하다고 여기지 못하는 것이다.

주어진 과업을 빠짐없이 수행했는지를

개인의 평가 기준으로 삼는 사회.

그 안에서 잠깐의 정체라도 있으면 개인은 초조해지고 숨이 막힌다.





지금보다 어려운 시절이 있었고,

우리보다 더 못사는 나라도 있으니

힘들어하는 건 엄살이라고 외치는 사람들도 있지만,

경제적 지표의 절대적 어려움이 아니라

사회의 모순됨에 우리는 날이 서고, 힘겹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종 이 곳을 ‘헬조선’이라 부른다.

다들 지옥에서 사는 듯 불행하니까.

우리는 행복할 수 없는 걸까?





많은 이들은 높은 행복도를 보이는 북유럽 국가를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레오 보만스에 따르면 북유럽 국가들의 높은 행복감은

높은 소득이나 복지시스템의 결과가 아니라,

넘치는 자유, 타인에 대한 신뢰, 다양한 재능과 관심에 대한

존중에 있다고 한다.





사람을 불행하게 하는 두려움의 실체는 가난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존중받지 못하는 비참함과 고립감이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 그 반대 지점에 있다.

자유의 박탈, 획일적인 삶의 강요, 타인에 대한 불신.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 실존의 문제만큼 절실한 사회적 복지는

마음껏 방황할 수 있는 자유와 그런 서로를 바라보는

너그러운 시선이 아닐까.

이건 교과서적인 말이 아니라

가장 본질적인 해결책일지 모른다.





서로에 대한 관용과 너그러움이

우리를 이 불행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우리, 이제 그만 불행하자.





행복은 깊이 느낄 줄 알고,

단순하고 자유롭게 생각할 줄 알고,

삶에 도전할 줄 알며,

남에게 필요한 삶이 될 줄 아는 능력으로부터 나온다.

_ 스톰 제임스





행복을 삶의 목적이라

부르지 않을 것





따지고 보면, 문제의 시작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삶의 목표를 행복이라 규정한 이후로,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감정의 유토피아를 삶의 목적이라 믿게 되었다.





하지만 사람은 행복하려고 태어난 낭만적 존재는 아니다.

인간의 원시적인 감정은 기쁨, 분노, 혐오, 공포, 슬픔, 놀람

이렇게 여섯 가지인데, 인간이 행복하려고 지구에 왔다면,

긍정적인 감정을 딸랑 한 가지만 셋팅해 놓았을 리 없다.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는 생각 자체가 대단히 큰 착각인 거다.





그런데 삶의 목적을 행복으로 규정하고

완전무결하게 행복한 삶이 존재하는 듯 떠들자

행복하지 않은 사람들은 실패자가 된 기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우울함을 감추기 위해 애쓰고,

슬픔은 어떻게 해서든 억눌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삶에 우울함과 슬픔이 있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베르사유 궁전을 아름답게만 두고 싶어서 화장실을 없앴다 해도

산다는 건, 궁전 구석에서 몰래 똥도 누고

때론 남이 싼 똥도 밟고 사는 것이다.





그러니 가끔은 슬퍼도, 우울해도 된다.

그 시간이 없다면, 행복이 무엇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물론 우리는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 하고,

나 역시 당신의 행복을 빈다.

하지만, 몇 번을 묻는다 해도 삶의 목적은 언제나

삶, 그 자체일 뿐이다.





+

10번 중에 6~7번 행복한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하지만 10번 중에 10번 행복하려 한다면, 그건 강박증이다.





가볍게 살아갈 것





내 첫 여행은 한달 일정의 배낭여행이었는데

혼자 하는 여행에 불안했던 나는 짐들을 잔뜩 챙겼다.

책만 세 권에 고데기도 두 종류를 챙겼으니,

짐을 쌀 때 미쳤던 게 틀림없다.

두 개의 가방을 낑낑 지고 다녔던 나는

여행이 일주일 남았을 땐 완전히 지쳐버렸다.

모든 상황이 지긋지긋했고,

무거운 짐을 지고 다니는 내 자신에 신물이 났다.

다음 여행지로 가기 위해 공항 의자에 앉아있던 나는

가방을 풀고 필요한 물건만 남긴 뒤

짐 절반은 쓰레기 통에 버려버렸다.

그렇게 절반의 짐을 버리며

불편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지만,

여행의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여행 중에 만났던 지인은 1년 반 넘게 여행 중이었는데

그가 가진 짐이라고는 배낭 하나가 전부였다.

그는 최소한의 짐만을 챙겼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그때그때 구입했다.

예를 들면 입고 있는 옷이 낡으면

현지 시장에서 구입하는 식이었는데,

그 자체로 여행의 즐거움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삶이 불안하다며 너무 많은 짐을 챙기지만

사실 그렇게 많은 짐이 필요하진 않다.

필요할 때 충당할 수도 있고,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쪽이 이득일수도 있다.





삶이란 오랜 여정이다. 최대한 가볍게 살아가야 지치지 않는다.

그러니 삶을 조금 더 가볍게 하고 싶다면

불안한 마음에 버리지 못했던 것들을 다시 한번 마주하고

그것들을 덜어내는 용기를 갖자.





여행 내내 한번도 꺼내지 않았던 짐과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한 걱정과

삶을 무겁게 만드는 불필요한 욕구와

잘못한 것 없는 부끄러움과

지치게만 하는 과잉된 관계.





이 모든 것에 대한 최후통첩.

그 포기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

자유롭게 살고 싶거든

없어도 살 수 있는 것을 멀리하라.

_ 톨스토이





삶의 경우의 수를

늘릴 것





영화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는

15년 동안 독방에 갇혀 군만두만 먹는다.

우진은 왜 그랬을까.

대수에게 인형 눈알을 붙이게 했을 수도 있고,

가끔은 물만두를 줬을 수도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예전에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

햄스터가 쳇바퀴 속에서 긴 시간을 살아간다 해도,

매일 같은 패턴과 같은 풍경 속에 살아왔다면

그 시간을 느낄 수 있겠느냐고.

한 가지의 패턴과 한가지의 풍경으로 압축된 과거는

그저 한 순간으로 지나갈 테다.

그러니까 우진이 오대수를 같은 풍경, 같은 패턴 속에 가둔 건,

그에게서 15년이라는 시간까지 빼앗고 싶어서가 아닐까.





피천득은 <장수>라는 글에서

“기계와 같이 하루하루를 살아온 사람은

팔순을 살았다 하더라도 단명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매일 비슷한 패턴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삶의 무수한 가능성과 다양성을 압축해버리는 일이고,

자신의 삶을 잃어버리는 일이다.

그러니 주말에는 바다를 보러 가고,

퇴근길에는 다른 길로 걸어보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이제까지 내가 시도하지 않았던 일들을 감행해보자.

자신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스스로에게 예측할 수 없는 내가 되어보는 것.





우리가 오래 살 수 있는 방법은

손에 있는 생명선을 팔목까지 연장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풍경을 마주하는 일이다.





메마르지 않으려

노력할 것





친구를 만나러 호주에 갔을 때 동물원에 간 적이 있다.

엄청난 규모와 인공적인 시설이 최소화된 동물원에 감탄하고 있었는데,

내 옆으로 아베크롬비 화보에서 나온 듯한 젊은 남자 무리가 지나갔다.

우리에게 동물원이란 대부분 아이를 동반한 가족의 공간인데

자연 속 동물을 구경하는 일이 젊은이들에게도 놀이인 것이 흥미로웠다.

그곳에서 우연히 대화를 나눈 호주인은

자신이 좋아하는 놀이가 버드 와칭(Bird watching),

그러니까 새를 보는 거라 말하기도 했다.





친구가 만난 10대 후반의 또 다른 호주인은

크리스마스에 가족들과 지낼 기대감을 늘어놓았는데,

할머니 댁의 저녁 식사자리에 얼마나 많은 음식이 차려지는지

얼마나 많은 가족들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지를 자랑했다고 한다.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호주 사람들이 느끼는 삶의 즐거움은 자연과 가족에 있는 듯 보였다.

가족으로 끈끈하게 결속한 우리에게 명절은 의무감이고,

크리스마스는 집에 있으면 처량한 날인데 말이다.





다니엘 튜더가 한국의 모습을 담아낸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라는 책 제목처럼

우리는 기적을 이룬 대신,

사소한 기쁨과 즐거움에 대한 감각을 잃은 듯하다.

그래서 우리는 동물원에 가고, 나무에 앉은 새를 보고,

가족들과 저녁을 먹는 것을 즐거움이라 여기지 않는다.





감정을 견뎌야 하는 노동과

우리를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경쟁 속에 감정은 메말라갔고,

즐거움은 지루한 일상을 견뎌낸 보상이자 강렬한 자극으로 정의되었다.

이는 감정이 메마른 사이코패스들이

극도의 쾌락을 추구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인데,

감정이 메마른 이들은 사소한 즐거움을 느낄 수 없기에,

점점 자극적인 즐거움을 찾게 되는 거다.

하지만 자극적인 즐거움이 끝난 일상은 더 무료해지고, 생은 활기를 잃는다.





만약 당신이 삶을 생생하게 느끼고 싶다면

삶의 앞마당에 있는 사소한 행복에 예민해지고

살아있는 삶에서 기쁨을 찾아야 한다.





즐거움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하며 가능한 어릴 때부터

돈을 들이지 않고도 즐겁게 할 수 있는 놀이와 방법을 익혀야 한다.

그건 구질구질하거나 초라한 것이 아니라

언제든 쉽게 행복해지는 일이다.





보고서 제출을 위해서가 아니라

공모전에서 수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을 위해

창조성과 상상력을 발휘할 순간이다.





다들 알아서

행복할 것





내 동생은 늦둥이다.

막내 동생은 부모님의 남은 숙제랄까.

엄마는 동생이 자리 잡고

잘 사는 걸 봐야 본인도 행복할 것 같다고 말했다.

부모 마음이 다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엄마가 행복했으면 좋겠는데,

엄마가 행복해지기 위해선 동생이 행복해야 한다.

그 말은 엄마의 행복이 자신의 통제권 밖에 있다는 뜻이다.

그건 자기 행복의 결정권을 문밖에 두고

누군가 초인종을 눌러주기를 기다리는 일이다.





그리고 그 결과 부모는 자식이 행복하지 않은 것에 근심을 느끼고,

자식은 부모가 행복하지 않은 것에 채무감을 느낀다.

결국 서로의 행복을 염려하며, 아무도 행복하지 못하게 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종종 사랑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리라’ 이야기하지만

감정의 간병인이 아닌 이상

우리는 누구도 지속적으로 행복하게 해줄 수 없고,

누구도 우리를 지속적으로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

타인의 행복은 사실 우리의 영향권 밖의 일이며,

행복이란 각자 책임져야 하는 거다.

그러니 자신의 행복을 방치하지 말자.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은 애정과 사랑은 나누되

자신의 행복에 책임을 다하는 것이니.

부디 다들 알아서 행복하자.





얻은 것은 무엇인지

생각할 것





내가 아는 어떤 이는 대학시절 금융권에 취업하려고

온갖 금융 자격증을 섭렵하며 많은 준비를 했다.

그 결과 높은 연봉을 받으며 증권사에 취업할 수 있었다.

그런데 1년 후, 그는 돌연 회사를 그만뒀다.

이유는 일이 재미가 없단다.

그렇다면 그는 재미를 중시하는 사람이었던 걸까?

예전엔 금융권에서 하는 일이 재미있어 보였을까?

그에게 재미란 과연 무엇일까?





애초에 문제는 그는 어떤 가치에 대해서도 제대로 선택하지 못한 것에 있다.

세상에는 나를 필요로 하는데, 재미도 있고, 합리적인 상사가 있으며,

월급과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춘

완벽한 직장은 없다.





대부분의 선택에는 한정된 예산과 제한적 선택지가 주어진다.

인생을 만수르가 이마트에서 쇼핑하듯이 살 수는 없는 거다.

그렇기에 선택에 있어 ‘무엇을 얻느냐’보다 중요한 건,

‘무엇을 포기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줄어드는 연봉과 또라이 상사를 견디는 일 사이에서,

커리어의 단절과 아이와 함께 하지 못하는 것 사이에서,

해보고 싶은 일을 포기하는 것과 고정적인 월급이 없는 생활 사이에서,

어떤 것을 더 견딜 수 없는지,

어디까지 감수할 수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 대답해야 한다.





늘 손해 보는 것만 생각하면 언제나 후회 속에 살 뿐이다.

어떤 것도 감수할 수 없다고 말하는

어리광을 들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지나간 과거와

작별할 것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반 아이 중 몇 명을 유독 예뻐했다.

수업 시간엔 항상 그 아이들에게만 질문했고 늘 그 아이들을 칭찬했다.





나는 나를 ‘주인공 옆에 앉아있는 엑스트라 같은 존재구나’라고 생각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내가 그렇게 느낄 정도니 어지간히 편애를 하셨나 보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선생님은 촌지로 유명했다고 한다.

한번은 선생님이 엄마를 불렀었는데,

엄마가 빈손으로 찾아가자 면박을 준 일이 있었다고 한다.

몇몇 아이들을 예뻐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나 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어른도 잘못할 수 있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저 ‘내가 주인공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은 꽤 오래 마음에 남아있었다.





세상엔 참 미친 인간도 한심한 인간도 많다.

그 사람들은 어린 시절 우리 내면에 상처를 주기도 했고,

지금까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남아 우리를 잡아 끌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현재의 문제를 과거에서 진단한다.

내가 자신감이 없던 것은 그 선생님의 차별 때문이었고,

내가 자존감이 무른 것은 부모의 양육 방식 때문이었고,

내가 열등감에 시달리는 건 아이들의 괴롭힘 때문이었다고.





거기까진 옳다.

하지만 우리가 과거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진단하는 것은

그 과거에 머물러 뒤늦게 보상받기 위함도 아니고,

자기 연민에 빠져 비운의 공주님 취급을 받기 위함도 아니라,

그 고리를 끊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다.





세상에는 한심하고 서툴고 성숙하지 못한 인간들이 있고,

우리는 운이 나쁘게도 그들을 만났을 수 있다.

그렇지만 과거를 보며 되짚어 볼 진실은

그 선생님은 그저 한심한 인간이었을 뿐이었고,

나의 부모도 처음부터 부모가 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닌

서툰 어른이었을 뿐이었고, 그 아이들은 철이 없었을 뿐이라는 것.





그리고 그때의 나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할 만큼

너무 어렸다는 거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무력한 어린 아이가 아니며

앞으로 나아갈 자격이 있다.





더 이상 과거에 붙잡혀 살고 싶지 않다면

과거의 연약했던 나에게 위로를

미성숙했던 그 모든 존재들에게 작별을 고해야 한다.





인생에 여백과

바보비용을 둘 것





디자인 작업물을 인쇄할 때는

바탕을 실제 사이즈보다 살짝 크게 작업한다.

재단 과정에서 오차가 생길 수 있으니 여백을 주는 거다.

그건 오차와 실수에 대한 관대함이자

안전한 결과를 위한 사람들의 노하우다.





삶도 이와 유사하다.

계획대로 딱 들어맞게 재단되는 삶은 없다.

불필요한 일에 노력을 쏟기도 하고,

한순간의 실수를 돌리기 위해 오랜 시간을 들이기도 하며,

아무리 조심해도 예상치 못한 비용이 들 때가 있다.

인생이 언제나 딱 들어맞을 수도, 효율적일 수도 없다.

그러니 자책하고 후회하기보다는

실수와 오차를 위한 여백과

바보스러움에 대한 예산을 책정하는 편이 낫다.





이 정도 바보짓은 인생에 있을 수 있다고,

이 정도의 삽질은 어쩌면 필요한 과정이었다고,

인생이 언제나 효율적일 수는 없다고,

처음 살아보는 인생이라 그게 나도 좀 어려웠다고 말이다.





그 오차와 실수에 대한 관대함이

우리를 보다 안전하고 자유롭게 만들 것이다.





그래도 당신은

당신을 이해할 것





예전에 성인 진로상담을 하는 분을 만난 적이 있다.

그분을 찾아오는 사람 중에는 소위 천재성을 타고난 사람들이 있는데

보통의 생각과는 다르게 그들의 삶이 그리 수월하진 않다고 한다.





그들은 학창시절 성적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은데

그 이유는 사고의 폭이 넓어서 주입식 교육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해서다.

에디슨이 1+1= 2를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들은 자신의 천재성을 발휘할 수 있는 분야로 가지 못하고

일반적인 직장에서 일을 할 경우, 그 생활을 견디기 힘들어 하고

그래서 우울증이나 강박증 약을 복용하며 회사에 다니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괴로워하는 그들을 향해 주변 사람들은

“남들도 다 원하는 일을 하고 사는 건 아니다”

“너만 힘든 게 아니다”는 말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 말에 자책감과 자괴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힘든 크기와 타인이 힘든 크기는 같지 않다.

세상에는 사람을 대하는 게 어려운 사람도,

달리기를 어려워하는 사람도 있듯이,

같은 문제에도 체감되는 난이도는 다른 법이다.





어떤 일이 유독 힘들다면

그건 내가 잘못된 사람이라서,

내가 엄살을 떠는 사람이라서,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에겐 그럴 수 있는 것이다.

기성화가 내 발에는 유독 아프게 느껴진다 해도,

그게 발의 잘못은 아닌 거다.





그러니 힘든 자신을 몰아세우지 말자.

그들을 비극으로 이끈 건,

그들조차도 힘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데 있었다.

자신을 이해한다는 것은

자기 연민에 빠져 스스로를 동정하거나

자신의 잘못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이는 자신을 학대하는 자기비판과

불필요한 자책감을 중단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자신에 대한 이해력과

자신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때론 이해 받지 못함이 서글플지라도

적어도 자신은 스스로를 이해해야 한다.





나의 행복에

관심을 가질 것





나는 한때 ‘불행 수첩’을 만든 적이 있다.

우울하고 절망하는 순간에 그 감정들을 기록해두었다가

기분이 나아지면 다시 읽어보았다.

그러면 내가 얼마나 비합리적인 생각을 하며

상황을 극단적으로 예측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몇 번 적고 보니 내가 너무 불행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그래서 수첩의 용도를 바꿔서 ‘행복 수첩’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우울함이 지나간 순간과 행복을 느끼는 순간을 수첩에 기록했다.





그렇게 수첩에 기록하고 보니,

나라는 사람이 언제 행복을 느끼는 사람인지 알 수 있었고,

우울한 순간도 곧 지나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행복하고 싶다 말하면서

무엇이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지조차 알려고 하지 않는다.





행복은 어느 날 아침 식탁 위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삶에 있어 알아두면 좋은 많은 것들 중

심폐소생술보다,

이어폰 줄을 꼬이지 않게 하는 법보다

연말 소득공제를 하는 법보다 더 중요한 건





나는 무엇으로 행복한가

나는 무엇으로 회복하는가

나는 어느 순간 살아있음을 느끼는가 하는

자신의 행복을 다루는 노하우이다.





행복하고 싶다면 당신의 행복에 관심이 필요하다.





완벽하지 않음을

사랑할 것





이세돌 vs 알파고

아날로그 시계 vs 전자시계

손편지 vs 이메일

LP판 vs MP3





우리는 완벽한 것을 동경하고

완벽하지 않은 것을 사랑한다.





어떻게 살 것인지 물을 것





나는 한동안 삶은 향유의 대상인가

아니면 의미 추구의 대상인가 하는 고민을 한 적이 있다.

답을 고르기는 어려웠다.





일단 삶의 의미라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두리뭉실한 소리 같았고 어떤 뜻인지 와 닿지 않았다.

복잡하게 생각하기 피곤했던 나는, 삶을 향유의 대상으로 여기기로 했다.

매 순간 최선을 다해서 생을 느끼고 즐겁게 살아가는 것.

실제로 그건 꽤 좋은 삶이다.





나는 삶에 가장 중요한 것들만을 남기려 노력했는데,

큰 카테고리에서 보자면

일, 인간관계, 즐거움, 정신적ㆍ신체적인 건강함이었다.

벌어지지 않은 일에 미리 불안해하지 않았고,

하고 싶은 일(Want)을, 할 수 있겠다(Can) 싶으면 했다(Do).





Want + Can = Do 라는 단순한 공식.

대신 열심히.





희미하게 계획했던 밑그림을 완성해나가는 것에 성취감과 기쁨을 느꼈다.

그러면서 나는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들,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들을 만났다.

중요하지 않은 사람들, 나를 짓누르는 관계와는 거리를 뒀고,

그들이 내게 함부로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내 삶의 즐거움을 위해 시간을 냈고,

하루에 몇 번 하늘을 보며 감탄하는 날들을 보냈다.

외면했던 문제에 직면하며 해결했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 노력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통념, 사회가 규정한 정답에서 한발 떨어지니,

삶은 명료하고 가뿐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잘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의문은 계속되었다.

매 순간 나의 삶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만으론 부족함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삶의 의미를 찾기로 했다.





무엇이 삶을 의미 있게 하는가?

많은 질문 끝에 내가 찾은 답은

개인의 영역에서 공공의 영역으로 나아가

사회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나는 앞서 사회를 위한 개인의 참여를 독려했다.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개인 문제를 해결하는

직접적인 방안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 안에서 자신의 몫을 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아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완성하기 위해선 타인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듯이,

사회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가치를 느낄 때,

우리는 자신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의 의미는 자신의 삶은 내팽개치고

남을 위해서만 희생하며 살라는 게 아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공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사회 안에서 존재감을 느끼라는 뜻이다.

나의 경우는 세상이 조금 더 괜찮은 곳이었으면 했다.

선한 의도를 가진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생계가 허락되기를 바랐고,

가난해서 힘들지라도 비참함을 느끼지는 않는 곳이 되기를 바랐다.

그래서 나는 지지하는 정당에 가입해서 작게 나마 후원금을 내기 시작했고,

올해부터 대안언론 두 곳을 더 후원하기 시작했다.

내가 마주치는 누구도 더 이상 모욕하지 않으려 애썼고,

책을 통해 작지만 유의미한 파동을 만들고 싶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끝나지 않던 질문, 아니 언제나 끝나지 않을 질문.

내 나름의 답을 이야기 하자면 우리 좋은 삶을 살자.

너무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열심히 일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함께 맛있는 것을 먹고, 좋아하는 노래와 좋은 책과 함께하며

날씨가 좋은 날 햇볕을 쬐는 것.

나는 그 일상의 따스함이 좋은 삶의 전부라 생각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의미 있는 삶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자.

비록 이 우주에서 먼지처럼 작은 존재일지라도

우리는 삶의 허무를 이겨내고 스스로의 존엄함을 지킬 수 있다.

세상이 규정하는 성패와 상관없이, 나는 그런 삶에 자부심을 느끼고 싶다.





어른으로 살아갈 것





어린 시절 엄마는 나에게 강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 생각하면 그래 봤자 30대 여자였다.

엄마도 무섭고 힘들고 벅찼겠지만,

누군가를 위해 꾹 참고 어른의 역할을 해냈을 뿐이다.





이제 나도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었다.

어릴 때는 밥 잘 먹고, 잠 잘 자는 것만으로도

내 역할을 충실히 해낸 거였지만

이제는 그런 일로 누구도 칭찬해주지 않는다.





왜 용돈을 주지 않냐며 부모님에게 투정을 부리면

내 새끼가 아니라, 호로새끼 소리를 듣게 된다.

아직은 마냥 보호받고 싶은 내가

어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유쾌하지 않지만

이제와 초록색 쫄바지를 입고 다니며 피터팬 행세를 할 수는 없다.





그러니 먹고 살기 위해선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고,

지겨움이든 불안함이든 견뎌야 한다.

아직 어른이고 싶지 않다 해도

우리의 부모님이 그랬듯 그렇게 어른인 척하며

어른이 된다.





Eㆍpㆍiㆍlㆍoㆍgㆍuㆍe





어른이 되어보니 세상은 냉담한 곳이었다.

부조리가 넘쳐났고, 사람들은 불필요할 정도로 서로에게 선을 긋고,

평범한 이들조차 기회가 있으면 차별과 멸시를 즐겼다.





돈을 벌기 위해 감정을 모른척해야 했고,

사회의 헐거운 안전망에 늘 불안감을 느껴야 했다.

나는 이 냉담한 세상에서 초라해지고 싶지 않았으며,

냉담한 누군가로 변해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많은 질문을 했다.

무엇을 부끄러워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나의 내면 가장 밑바닥에 있는 열등감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차별과 모욕으로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인가에 대하여.

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불행에 허우적거려야 하는가에 대하여.





그 답을 따라가며,

한 개인의 불행과 불안은 내면에서 발생하는 화학 작용이 아닌

많은 부분 사회와 타인과 관계 속에서 일어났다는 결론에 닿았다.

먹고사는 일에 대한 불안 외에도

타인에 대한 불신, 모욕, 경쟁적 인간 관계, 차별은

공기 중으로 흩어져서 숨쉴 때마다 우리에게 스며들었다.

그 결과 우리는 불필요한 일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고,

모욕에 주눅 들어야 했고,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날을 세우며 경계해야 했다.





아무 문제 없는 자신을 탓하느라,

실존의 문제를 해결하기도 전에 탈진해가는 거다.

나는 책을 통해, 그럴 필요 없다고 말하고 싶었다.

불신 속에서 고독하고 외롭게 남아있는 누군가에게

그대는 당당해도 된다는 응원이자

여전히 인간적인 삶을 갈망하는 누군가가 있다는 신호이고 싶었다.





냉담한 세상에서 인간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하여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조금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부당함과 모욕과 불안에 당당하게 맞서야 한다.

그리고 나와 타인을 위해,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자신의 몫을 해야 한다.





보통의 존재가

내가 아닌 것을 시기하지 않으며

차가운 시선을 견디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살아가기 위하여.





당신이 조금은 자유로워졌기를 바란다.

우리에게 건투를 빈다.





Tㆍhㆍaㆍnㆍkㆍs tㆍo





시작은 사회 심리학을 읽기 편한 에세이로 풀어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어려워서, 내가 이러려고 책을 썼나…

8시간 앉아있으면 7시간은 머리를 뜯었고,

답답해서 뒷산에 올라가 소리를 지르고 온 날도 있었습니다. (크크)

그럼에도 열심히 해서 책을 완성한

경기도에 거주 중인 김수현 씨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책이 나올 때까지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여러 책을 읽었는데, 그 중에서도 큰 도움을 받은 책으로

심리학자 김태형 님의 《트라우마 한국사회》, 《불안증폭사회》,

오찬오 교수님의 《모멸감》, 알랭 드 보통의 《불안》,

강준만 교수님의 《개천에서 용나면 안 된다》,

리처드 니스벳의 《생각의 지도》, 나다니엘 브랜든의 《자존감의 여섯 기둥》,

서은국 교수님의 《행복의 기원》 정도를 꼽고 싶습니다.

이 책의 기초가 된 작품들입니다. 저자 분들의 깊이를 다 담아낼 순 없겠지만,

좋은 책들이기에 추천하고 싶습니다.





사적인 땡스투를 더 이어가자면,

지지와 존중을 보내준 가족, 애정 하는 친구, 지인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특히 초고로 쓴 어설픈 글을 읽고 열심히 피드백을 해준

유림이, 현지, 보람이, 유민이, 은혜,

그리고 친언니에겐 한번 더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책은 어느 때보다 출판사의 도움을 많이 받아서 완성한 책입니다.

네 번째 책을 함께 하고 있는 마음의숲의 권대웅 대표님과

시원시원한 희영 팀장님, 해사한 미소의 보람 씨, 따뜻한 광표 과장님,

늘 바쁘신 노부장님께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더불어 SNS를 통해 받은 응원은 책을 쓰는 동안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1년 6개월이라는 긴 시간 동안,

많은 도움과 응원 덕분에 책을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 응원을, 심지어 땡스투까지 읽어주신 당신에게 전하고 싶습니다.





당신을 위해 쓴 책입니다.

우리, 잘 살아냅시다.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copyright©2016 김수현





글ㆍ그림 김수현





1판 1쇄 발행 2016년 11월 28일

1판 7쇄 발행 2017년 2월 28일





발행인 신혜경

발행처 마음의숲





대표 권대웅

편집 송희영

디자인 고광표

마케팅 노근수





출판등록 2006년 8월 1일(105-91-03955)

주소 서울시 마포구 동교로 144-13(서교동 463-32, 2층)

전화 (02) 322-3164~5 | 팩스 (02) 322-3166

페이스북 facebook.com/maumsup

ISBN 979-11-87119-84-5 (03810)





저자와 출판사의 허락 없이 내용의 일부를 인용, 발췌하는 것을 금합니다.

잘못 만들어진 책은 구입하신 곳에서 교환해드립니다.





마음의숲에서 단행본 원고를 기다립니다.

따뜻하고 생동감 넘치는 여러분의 글을 maumsup@naver.com으로 보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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